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나오자 4월의 공기가 시원했다. 미세먼지마저 사라져 하늘까지 싱싱해 보였다. 저 하늘의 태양과 고층빌딩의 유리가 반사하는 빛은 딱 한 곳, 서울지하철 2호선 선릉역 5번 출구로 쏟아져내렸다. 바로 그곳에 안상호(가명, 1987년생)가 서 있었다.

“그날 제가 ‘날백’을 찍었거든요. 세상의 모든 빛이 나한테만 쏟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우주를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니까요! 세상 무서울 게 없었죠. 내가 대기업에서 괜히 선배들 눈치 보고 살았구나, 나 정말 퇴사하길 잘했구나… 스스로에게 엄청 박수를 쳤죠!”

날백은 ‘하루에 백만 원’을 벌었다는 뜻으로, 다단계 성지로 통하는 강남 테헤란로에서 쓰이는 은어다. 처음 다단계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대개 날백의 꿈을 꾼다. 누가 ‘날오백’, ‘날천’을 찍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초심자들은 소박(?)하게 시작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겨울. 테헤란로 입성 3개월 만에 날백을 찍었다는 안 씨는 인터뷰 장소인 용산 호프집에 밤 10시 30분에 나타났다.

“쿠팡이츠에서 야간 배달을 하는데 2만 원, 3만 원 주문이 밀려들면 묘하게 흥분됩니다. 주문 다 처리하고 오느라 늦었네요.”

낮에는 학습지 교사로, 밤에는 배달노동자로, 주말엔 단역배우로 일하는 안 씨에게 자유시간은 야식 배달 주문이 뜸해지는 밤 10시 이후뿐이었다. 날백의 꿈을 이룬 안상호 씨는 왜 한겨울에 ‘쓰리잡’을 뛰는 걸까.

날백을 찍으면 사람이 미쳐버려요. 소주가 위스키로 바뀌고, 점심부터 한우 굽고, 전철 타러 지하로 내려가기 싫어서 택시를 불러요. 그러다보면….”

호프집 치킨을 앞에 두고 날백의 추억을 곱씹을 때마다 안 씨의 눈이 빛났다. 단역이 아닌 주연을 연기해도 괜찮을 법한 잘생긴 얼굴에선 고단함 대신 생기가 돌았다.

“그날 제가 ‘날백’을 찍었거든요. 세상의 모든 빛이 나한테만 쏟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pixabay

추억이 자양강장 효과를 내는지 안상호 씨는 180cm에 이르는 키와 군살 없는 몸에 여러 제스처를 녹여가며 테헤란로 다단계꾼의 삶을 풀어냈다. “나도 한땐 잘나갔다”는 식의 허세만은 아니었다.

“저의 진짜 자부심은 날백이 아니에요. 테헤란로를 자기 발로 탈출했다는 것, 아무나 못하는 그 일을 내가 해냈다니까요! 다단계 중독이 알콜릭이나 도박만큼이나 무서운 건데, 제가 그걸 끊었다는 거 아닙니까!”

안 씨는 오른팔로 칼을 내리찍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서른 살 이전까지 안 씨의 삶은 배달노동이나 다단계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일명 ‘SKY’ 대학을 나와 대기업 계열사인 제약바이오 업체에 다녔다.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지만, 안 씨는 좀처럼 만족이 되지 않았다.

“연봉 칠팔천에, 성과급까지 1억 벌면 뭐 합니까. 회사에 좋은 아이디어 내고, 프로젝트 맡아서 열심히 해도 아부 잘 하는 윗사람들이 더 많이 챙겨가고 승진하는데. 저는 크게 성공하고, 빨리 많은 돈을 벌고 싶었어요. 대기업이라지만, 월급 받아서 어느 세월에 부자가 됩니까.”

안상호 씨는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코인으로 부자의 길을 모색했다. 제약회사에 다니던 2021년, 안 씨는 다단계업체가 운영하는 밈코인에 150만 원 정도 투자했다. 다단계업체는 금방 문을 닫았고 150만 원은 0원이 됐다.

“지금은 하루 2~3만 원 벌려고 야간배달도 하지만, 그땐 150만 원 정도는 인생 수업료 정도로 여겼죠. 저렴한 대가 치르고 인생 좀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 씨는 대박을 꿈꾸며 코인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는 주류 금융시장에 들어온 비트코인 등에 머물지 않고 ‘디파이’라 불리는 투자에 눈길을 돌렸다. 은행이 예치받은 고객의 돈으로 대출 등의 수익사업을 하듯이, 디파이 업체도 코인을 예치받아 사업을 진행한다.

은행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만, 디파이 업체는 일명 ‘탈중앙 거래’다.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싫어하는 이들은 탈중앙에 환호한다. 하지만 강남 테헤란로에서 성행하는 코인 다단계 사기업체는 주로 디파이 시스템을 활용한다.

안 씨는 지인을 통해 테헤란로 ‘다단계 죽돌이’를 만났다. 죽돌이는 안 씨만큼이나 잘생기고, 잘 입고, 돈도 잘 썼다. 안 씨는 그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테헤란로서 열린 코인 다단계 설명회장에 갔더니, 여러 노인이 그 죽돌이 형을 “리더님”이라 불렀다.

서울 테헤란로에서 진행된 한 다단계 투자 설명회 모습 ⓒ셜록

안 씨는 사람들이 추앙하는 ‘형님 리더’처럼 되고 싶었다. 그는 결국 2022년 초, 연봉 8000만 원 받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테헤란로 다단계에 뛰어들었다. 돈 수천 만 원 투자하는 선에서 멈추는 게 아닌, 직접 설계자가 되는 ‘상위 리더’를 꿈꾼 것이다.

안상호 씨는 ‘○○디파이’에 손을 대면서 다단계 업체 조직 생활을 시작했다. 또 수백만 원을 잃고 조직은 해산됐다.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다.

“다단계 사람들은 무리 지어 다니거든요. 처음엔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제 또래의 2030세대 남녀가 늘 붙어 다니면서 서로 ‘리더님’이라 불러주고, 좋은 술에 좋은 음식 먹으면서 돈 팍팍 쓰면서 사니까 얼마나 재밌습니까. 처음엔 여기에 중독이 되는 겁니다.”

안 씨는 당시의 기분을 ‘도파민 분출’이라고 표현했다. 쾌감의 정점은 ‘다이○○’이란 코인 다단계에 발을 들이고, 통장에 ‘날백’이 찍힐 때 찾아왔다.

“어릴 적 오락에 중독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날마다 회사 다녀봤자 월 1000만 원 받기도 힘든데, 통장에 하루에 100만 원 찍혀보세요. 일주일이면 700만 원, 한 달이면 3000만 원…. 한두 달만 지나면 웬만한 직장인 연봉이 들어오는 거잖아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가 다이○○이란 코인 다단계 업체에 넣은 돈은 3000만 원인데, 하루 100만 원씩 며칠간 입금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상은 달라졌다.

“집에 갈 때 사람 바글바글한 지하철 안 탑니다. 바로 택시 타는 겁니다. 만 원짜리 순댓국밥 같은 거 안 먹고, 호텔 바로 사람들 불러모아 위스키 따는 겁니다. ‘나 오늘 날백 찍었다’ 자랑하면서요.”

코인 다단계 바닥에선 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안 씨는 또래 중심의 팀에 들어갔고, 다시 그 아래에 팀을 꾸렸다. 아래에 팀이 생기면 자신은 ‘리더’라 불린다. 강남 테헤란로에 리더라 불리는 사람이 많은 건 이런 환경 때문이다. 리더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다단계 세계에서 리더십은 돈 씀씀이에서 나온다.

“팀을 조직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일단, 엄청 돈이 많은 척, 잘나가는 척을 해야 돼요. 밥을 살 거면 삼겹살이 아닌 한우를 사야 하고, 소주 한잔 대신 위스키를 살 수밖에 없어요.”

날마다 100만 원이 들어오면 이런 삶도 가능은 하다. 한 달에 열흘만 날백이 찍혀도 리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문제는 날백이 며칠 못 간다는 거예요. 한 달에 5일이요? 그 정도만 되면 테헤란로가 미어터지겠죠. 이삼일 이어지는 것도 힘들어요. 잘난 척하느라 씀씀이는 커질 대로 커졌고, 리더 체면상 순댓국 먹기도 그렇고…. 돈이 줄줄 녹아내리는 겁니다.”

○○디파이가 문을 닫은 것처럼 다이○○도 폐업을 했다. 테헤란로 코인 다단계 업체는 늘 그런 식이었다. “1개월 투자로 원금 두 배 수익”을 홍보해 사람들을 불러모은 뒤, 25일 만에 문을 닫거나, “전산에 오류가 생겼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회사가 사라진다.(관련기사 : <마카오에서 두바이까지… ‘코인여왕’ 제니 킴의 정체>)

다단계 업계 리더를 꿈 꾼 안 씨는 1년여 만에 투자금 1억 원을 잃었다. 큰돈을 잃고 나서야 테헤란로 다단계 생태계 특징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더라 불리는 사람들 태반이 자기 명의로 된 신용카드, 휴대전화가 없었다. 전화기 두세 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자기 명의로 개통한 폰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따르던 리더 다수는 신용불량자였다.

안 씨의 처지도 나날이 나빠졌다. 그는 2023년 초, 잃은 1억 원을 되찾기 위해 전세 보증금 1억 원을 빼 다시 코인 다단계 업체에 넣었다.

다단계 투자에 나선 노인들이 스마트폰으로 코인 시세 등을 확인하고 있다 ⓒ셜록

“카지노판에선 사람들이 언제 떠납니까? 다시 태어나겠다는 굳건한 결심을 한 뒤에? 그런 사람 없잖아요. 돈을 다 잃고 더는 베팅할 게 없을 때 마지못해 일어나잖아요. 근데, 다단계판은 카지노보다 심해요. 절대 떠날 수가 없다니까요.”

이유가 뭘까?

“날백의 맛을 봤잖아요. 그거 잊을 수가 없다니까! 게다가 자기 밑에 팀을 꾸려서 대장 노릇도 해봤잖아요. 이 맛을 본 사람들은 빈털터리가 돼도 절대로 식당에서 설거지 안 한다니까요. 앉아서 하루 100만 원 벌어본 사람이 어떻게 시급 1만 원짜리 노동을 합니까? 죽으면 죽었지, 다들 땀 흘려 일하는 걸 죽도록 싫어해요.”

안 씨는 전세 보증금 포함 약 2억 원을 잃고 2024년 여름 다단계 조직 리더 생활을 청산했다. 돈은 벌어봤지만, 월급쟁이보다 돈은 모이지 않는 세계에 염증이 났다. 노인들에게 큰돈을 벌 수 있다고 거짓말 하는 것도 더는 못할 짓이라 판단했다.(관련기사 : <우리 아버님들 테헤란로 왜 오셨습니까? “돈 벌러요!”>)

“제가 다단계판을 겪고 나니까 영화 <타짜>가 정말 명작이더라구요. 화투판에서 날고 긴다는 전설적인 영화 속 캐릭터들을 보세요. 짝귀(주진모 분)는 귀 잘리고, 아귀(김윤석 분)는 손 찍히고, 평경장(백윤식 분)은 죽고. 코인 다단계판도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안 씨는 끝내 다단계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쓰리잡’을 뛰며 땀 흘려 일하는 삶을 7개월째 이어가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 그는 무안한 상황에 빠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처럼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코인 다단계를 만나서 직업 잃고, 돈 잃고, 전셋집까지 잃은 제가 이런 말 하면 웃으시겠지만… 제 꿈은 코인으로 부자가 되는 겁니다.”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코인을 산다고 했다. 안 씨는 묘한 말로 여운도 남겼다.

“많은 걸 깨달은 지금 제가 다시 테헤란로 다단계판으로 가면 정말 돈 벌 자신 있습니다. 다들 멍청하고, 자기 욕심 컨트롤 못해서 ‘똑똑한 설계자들’에게 당하거든요. 제가 다시 들어가면 정말 돈 벌 자신 있는데….”

2024년 겨울이 가고 2025년 봄이 찾아온 지금. 안 씨는 배달 일을 하지 않는다. 여운으로 남은 공백의 자리에 다른 그림이 채워졌다.

지난 3월, 안 씨는 다시 테헤란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번엔 전망이 유망한 업체에서 개발자 역할을 하고 있다”며 나를 사업장으로 초대했다. 자기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4월 초, 그가 일하는 테헤란로 다단계 업체에서 하루를 보냈다. 이번엔 의류 다단계 업체였다. 그날 해당 업체는 사업설명회를 열었다. 새로 시작하는 업체답게, 업체는 설명회 참석자들에게 고기, 떡, 식사를 제공했다.

서울 테헤란로 한 빌딩에서 진행된 다단계 설명회장 모습. 다단계 업체가 음식을 제공하면서 노인 약 100명이 몰렸다. ⓒ셜록

음식이 나온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는지 오전 11시부터 70~80대 노인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행사장은 순식간에 노인 1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경로잔치 현장처럼 음식을 먹던 노인들 사이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다.

“왜 음식을 몰래 싸서 가방에 넣어요! 여기서 회사지 무료급식소입니까!”

업체 ‘리더’라는 중년 여성이 소리를 질렀다. 검은 봉지에 급히 음식을 담던 80대로 보이는 노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몰래 싸긴! 봉지에 담아서 먹으려는 거지! 누굴 거지 취급하는 거야!”

리더는 목청이 더욱 높아졌다.

“거지처럼 구니까, 거지 취급을 하는 거죠! 음식 다시 꺼내놓으세요!”

소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곳곳에서 이어졌다. 익숙한 풍경인지, 다른 노인들은 소란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식사에 집중했다. 눈치 빠르고 솜씨(?) 좋은 노인들은 이런 와중에도 리더들 눈을 피해 음식을 가방에 숨겼다.

안상호 씨 역시 노인들의 소란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행사장 내 자기만의 사무실에서 ‘다단계 회원관리’ 업무에 집중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다단계 낭인들이에요. 돈도 없고, 어디 가서 일하기도 힘든 노인들이 다단계 설명회장 돌면서 밥도 먹고, 믹스커피도 드시고, 강연도 듣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했잖아요. 이 바닥에서 날백을 찍은 사람들은 다시는 땀 흘려 일하는 거 싫어한다고. 간간이 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다 그런 분들이에요.”

안상호 씨는 지난겨울에 했던 말이 떠올랐는지 멋쩍게 웃었다. 그는 “이번 사업을 설계하신 분들은 정말 사업 마인드도 좋다”며 “나는 전산업무를 도와주고 있는데, 잠깐 일하고 돈 벌어서 (테헤란로를) 뜰 것”이라고 말했다.

안 씨는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코인 다단계 고발 프로젝트 ‘테헤란로의 좀비들’ 기획을 초기부터 도와줬다. 그의 말은 여러 곳에서 들어맞았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딱 들어맞았다. 다단계판을 떠난다는 건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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