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로서 평생 명예를 먹고 살았다.”
한 전직 장관은 2009년 10월 발간된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일생을 “선비”, “명예”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대단한 자신감이다. 정말 그에 걸맞은 삶을 산 것일까?
몇 걸음 양보해서, 회고록이니까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회고록이라는 게 당사자에게 유리하게 쓰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그동안 발간된 이런저런 회고록 가운데 그렇지 않은 게 얼마나 되느냐, 누군가는 이런 주장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 본령을 무색하게 만드는 회고록이 적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회고록에서는 역사를 멋대로 재단해도 괜찮다는 허가장이 될 수는 없다.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에도 문제가 될 만한 대목이 많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5·16쿠데타(1961년)를 “5·16혁명”으로, 유신 쿠데타(1972년)를 “우국충정”의 산물로 미화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찬양하는 한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인 박근혜는 읽기 민망할 정도로 띄우면서(물론 박정희 정권 시기에 숱하게 자행된 고문과 인권 탄압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친북적·좌파적”이라고 한칼에 매도하는 등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런데 발간 후 7년이 넘도록 이 회고록을 둘러싼 어떤 논란도 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비공식 출판물이기 때문이다. 일부 지인에게만 공개한 것으로 보이는 이 회고록의 내용이 세상에 알려진 때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2017년 1월. 자신의 일생을 “선비”, “명예”라는 말로 자신 있게 압축해놓고 정작 세상에 널리 공개하지는 않은 이 이상한 회고록의 주인공은 김기춘이다.
황금시대에서 죄수복까지, 김기춘과 박정희 부녀의 “운명적인 인연”
“운명적인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비공식 출판물이기에 속마음을 드러내기 더 편했을 이 회고록에서 김기춘은 박정희·박근혜 일가와 맺은 인연을 이렇게 규정했다. 운명. 웬만한 사이에서는 쓰기 어려운 거창한 말이지만, 김기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렇게 지나친 표현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 18년은 김기춘에게 황금시대였다. 김기춘은 독재자 박정희와 그 심복 신직수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검사가 된 지 10년밖에 안된 1974년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5국장)으로 임명될 정도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얘기를 듣던 중앙정보부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던 대공수사국장 자리를 35세의 젊은 나이에 꿰찬 것이다. 재계에 이명박(36세이던 1977년 현대건설 사장 취임)이 있다면 법조에는 김기춘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초고속 승진이었다. 1970년대에 김기춘은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하고 조작 간첩 제조 사건에서 수사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독재 정권 보위에 열과 성을 다했다.
박정희와 맺은 인연의 속편 격이긴 하지만, 박근혜와 맺은 인연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김기춘은 7인회의 일원으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적극 나섰고, 박근혜 정권 출범 반년 후인 2013년 8월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다. ‘기춘대원군’ 등으로 불린 실세 김기춘은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면서 죄수복을 입는 처지에 놓였다. “운명적인 인연”답게 수인 번호 503 박근혜와 나란히.
회고록에서 김기춘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원칙과 판단력,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자애로움을 겸비”한 “훌륭한 정치 지도자”라고 박근혜를 치켜세웠다. 낯 뜨거운 찬사는 공식 석상에서도 계속됐다. “우리 대통령은 차밍(charming, 매력적)하고 디그너티(dignity, 위엄) 있고 엘레강스(elegance, 우아)하다.”(2013년 청와대 기자단 송년회) 화답이라도 하듯 박근혜도 김기춘을 상찬했다. 김기춘에 대한 비판과 퇴진 요구가 빗발치는데도 “정말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2015년 신년 기자 회견)이라며 김기춘을 계속 곁에 뒀다.
죄의식도 부끄러움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김기춘과 박근혜의 공통점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짓밟고 나라를 망치고도 죄의식, 부끄러움 같은 건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박근혜, 김기춘은 진정성 있는 사과도 반성도 참회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불리할 때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한 적은 있지만 진정성을 느낄 수 없는 면피용일 뿐이었다.
법정에서도 박근혜의 경우 반성은 고사하고 자기 입으로 증언하는 모습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피고인 박근혜가 법정에서 한 말은 재판장이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무직이라고 답한 게 전부라는 지적까지 8월 초에 나왔겠나. 그러다가 10월 16일 법정에서 처음으로 발언을 하긴 했는데, 역시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추가 구속 영장이 발부된 후 열린 이날 재판에서 박근혜는 자신의 현 상태가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 결과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자기 입으로 얘기하는 게 박근혜보다는 많다는 것을 제외하면, 김기춘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하면서도 죄가 없다고 우겼다.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특검 측이 “피고인은 전혀 잘못한 바가 없고, 단지 비서실장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못 보좌했다는 취지로 이해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김기춘은 “그런 취지로 이해하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보석을 신청하고 자비를 구했다.
이러한 모습은 재판 전략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게 전부일까?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냐? 난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모략에 빠져(또는 못된 자들의 거짓 선동에 넘어간 무지한 국민들 때문에) 이렇게 됐을 뿐이다’, 이런 마음을 계속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이들의 행태를 ‘나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는 기괴한 확신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많은 국민이 생각하는 애국과는 거리가 멀게 행동하면서도 박근혜는 ‘걸핏하면’이라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애국이라는 말을 자주 꺼내곤 했다. 사고의 폭과 어휘력이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개인적인 특징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 전 실장이 평소 애국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는 조원동(박근혜 정권 초기 청와대 경제수석)의 법정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김기춘도 이 표현을 즐겼다. 박근혜, 김기춘의 이러한 모습은 “탄핵 반대”(가결 후엔 “무효”)를 강변하며 온갖 행패를 부린 극렬 박근혜 지지자들이 자신들을 애국 세력이라고 내세우는 것과 상통한다.
이렇게 애국이라는 개념을 오염시켜 멋대로 갖다 붙이는 건 극렬 박근혜 지지자들만의 문제도,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를 뒤틀리게 만든 극우 반공 세력 전반이 오랫동안 보인 행태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두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밀정 이종형의 궤변과 애국자 둔갑, 그리고 박근혜·김기춘의 오늘
“나는 진짜 애국자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된 이종형은 법정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반성할 것도 없다. …… 공산당을 토벌하였다고 재판하는 이 법정에서는 나는 재판을 못 받겠소. …… 내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지 않고 내 손에 쇠고랑을 채워주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었다. ‘공산당 토벌’ 운운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종형이 때려잡은 건 독립 운동가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종형은 고급 밀정이었다.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출소해(옥중에서 전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 만주에 나타났다. 그때부터 1940년대까지 이종형은 밀정으로서 독립 운동가를 살해하거나 밀고하는 데 열을 올렸고, 국내에 돌아온 후에도 일제의 주구 노릇에 열중했다. 이종형의 ‘활약’에 일제 고등 경찰이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영화 <암살>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도 이종형이다. 남자현은 1933년 관동군 사령관이자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 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 발각·체포돼 그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암살 계획을 밀고한 자가 바로 이종형이다.
해방 후 이종형은 ‘여운형이야말로 친일파’라며 여운형을 헐뜯는 데 앞장서고, 심지어 여운형 암살을 부추기는 듯한 기사까지 내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기회 삼아 ‘반공 애국자’로 자신을 세탁하면서 김구의 반탁 진영에 동참했고 이승만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 후 ‘친일파 청산은 빨갱이나 하는 주장’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반민족행위특별법 제정을 막는 데 앞장섰다.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에는 자신이야말로 “진짜 애국자”라고 뻔뻔하게 주장했다. 1949년 6월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무력화했고, 두 달 후 이종형은 풀려났다. 이듬해(1950년) 이종형은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이 된다.
오늘날 활개 치는 극우 반공 세력의 뿌리를 찾아가면 이종형 같은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 극우 반공주의를 매개로 한 애국자 둔갑,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 세력이라는 기괴한 확신은 그만큼 뿌리가 깊고 광범위하며 해악도 크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자. 박근혜, 김기춘 같은 사람들의 속마음은 이종형의 1949년 법정 궤변과 얼마나 다를까? 다르기는 할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뻔뻔한 확답…김기춘은 어떨까?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목사로 변신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아니다”라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한 일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다며,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는 얘기까지 했다. 애국자 둔갑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이근안은 자신이 한 건 고문이 아닌 심문, “일종의 예술”이었다는 궤변도 빼놓지 않았다. 이근안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는 건 과거에 고문 기술자들을 부추기고 그들이 마음껏 고문할 수 있게 해준 세력이 여전히 막강한 상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근안은 김기춘과 동시대 사람이다(이근안이 한 살 위).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을 담당했던 점은 같지만, 활동한 방식이나 걸어온 길은 적잖은 차이가 난다. 엘리트 검사 김기춘이 1970년대에 특히 잘나가며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수사 책임자로서 윗선에서 움직였다면, 경찰 이근안은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에 일선에서 직접 고문하며 악명(특히 전두환 정권 때)을 떨쳤다. 고문 기술자는 민주화 운동가는 물론 평범한 시민들도 먹잇감으로 삼아 실적을 쌓았다.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로 불리던 이근안은 6월항쟁(1987년) 이듬해인 1988년 12월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수배됐다. 11년이나 잠적한 끝에 1999년 10월 28일 자수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 김기춘은 장관을 거쳐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김기춘의 고교·대학교·검찰·중앙정보부(정형근의 경우 그 후신인 안기부) 후배이자, 자수 후 이뤄진 이근안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김근태 고문 사건(1985년) 당시 김근태 수사에 이근안을 투입하게 한 인물로 지목된 정형근도 김기춘과 같은 해(1996년)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승만 집권기에 갖가지 반민주 행위를 한 자들 가운데 행동대로 나섰던 일부 정치 깡패들은 4월혁명(1960년)과 5·16쿠데타 후 처형되지만 거물들은 대부분 살아남아 박정희 집권기에도 잘나간 것을 생각나게 하는 풍경이다. 잠적한 시기에 이근안은 김기춘, 정형근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전두환 식으로 표현하면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한 가지 더 생각해보자.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김기춘에게 한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김기춘의 속마음은 이근안의 대답과 다를까? 김기춘의 행태를 보면 답은 자명해 보인다.
“당신이 한 일이란 태어났다는 사실뿐입니다”
<피가로의 결혼>을 매개로 되짚은 박근혜의 삶
“염병하네.” 2017년 1월 25일 특검에 소환되면서 “너무 억울하다” 등의 고함을 치는 최순실을 건물 청소 노동자는 이렇게 꾸짖었다. 수많은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 ‘사이다’ 발언이었다. 이 발언이 들어맞는 대상은 최순실만이 아니다. 박근혜, 김기춘은 물론 이종형, 이근안 같은 사람들에게 확대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높은 학력과 그럴싸한 언변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며 국정 농단 세력을 법정 안팎에서 비호하는 이들도 피해갈 수 없다.
이처럼 한마디로 혼내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을 찬찬히 짚어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 일환으로 필자는 김기춘의 삶을 되짚으려 한다. 김기춘이 박근혜와 다른 점도 여럿 있는데, 여기서 잠시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1786년 첫 상연)을 살펴보자. 피가로는 다재다능했지만 신분이 미천해 이발사 겸 외과 의사(이 시기에는 이 두 가지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로 사는 데 만족해야 했다. 또한 백작 부인의 시녀를 사랑하지만 백작의 방해를 받았다. 피가로는 분노했다. “그처럼 많은 멋진 것들을 가지기에 합당할 만한 무언가를 당신은 했단 말입니까? 당신이 한 일이란 태어났다는 사실뿐입니다.” (<피가로의 결혼> 부분은 『민족주의 길들이기』(장문석, 지식의풍경) 참조)
프랑스대혁명(1789년) 이전 구체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인데, 박근혜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박근혜는 5·16쿠데타(당시 9세) 이후, 박정희의 딸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처럼 많은 멋진 것들”을 손쉽게 누릴 수 있었다. 박정희가 자초한 10·26사건으로 박근혜의 삶도 흔들리긴 하지만, 땀 흘려 일하지 않고 특혜를 누리는 삶의 근간이 바뀌지는 않았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제 손으로 노동하지 않고도 “그처럼 많은 멋진 것들”을 누리는 삶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그러면서 재임 기간 중 노동 개악을 밀어붙인 것도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편법 상속과 온갖 ‘갑질’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그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각종 특혜를 평생 누리는 재벌가 자제들의 삶과 많은 부분 닮았다.
‘저렇게 해야 더 크게 성공하는구나’
출세 지향 법조인들의 잘못된 인생 모델, 김기춘
김기춘은 그와 다르다. 적어도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기까지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했다. 물론 ‘김기춘은 정말 유능한 사람’이라는 일각(주로 극우 반공 인사들)의 평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김기춘이 발휘한 능력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면서 권력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런 것을 유능하다고 규정하는 건 적합하지 않다. 그렇기는 하나 극우 반공 인사들 가운데 김기춘이 그런 쪽으로 일정하게 역량을 발휘한 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자의 눈에 들어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그 결과 김기춘은 출세 지향 법조인(특히 검사)들의 유력한 인생 모델이 됐다. “저런 검사도 다 있나”라며 김기춘을 평생의 표상으로 삼았다는 후배 검사의 이야기가 기사에 등장할 정도였다.
노태우 정권 시절 김기춘은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맡으면서 검찰 조직을 상징하는 인물로 통했다. 그만큼 많은 검찰 관계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초고속 승진 신화에 더해 김기춘이 ‘검찰 공화국’ 구축의 주역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초원복집 사건(1992년) 이후에도 검찰 쪽에서는 김기춘의 잘못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았다. 타산지석으로 삼았다면, 오늘날 ‘검찰 공화국’ 문제가 시급한 개혁 과제로 꼽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단죄되지 않고 계속 권력을 휘두르는 김기춘의 모습은 출세 지향 법조인들에게 ‘김기춘처럼 해도 되는구나’를 넘어 ‘저렇게 해야 더 크게 성공하는구나’라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하는 명확한 신호였다. 그러니 검찰에서 김기춘의 후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리틀 김기춘’으로 통하는 우병우까지 그 맥이 이어진 것이다.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또 다른 ‘리틀 김기춘’들이 계속 출현할 수밖에 없다. 악취를 폴폴 풍기는 김기춘의 삶을 되짚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기춘의 삶을 중심으로 연재를 진행하되 김기춘이 살아온 시대를 함께 다루려 한다. 그동안 간과된 주제(김기춘과 한국 야구 등)도 다룰 계획이다. 이제 장목(김기춘의 고향)으로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