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캄캄한 새벽이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다. 오가는 사람, 차는 없었다. 가로등이 밝히는 저 좁은 땅에 누군가 나타났다. 그는 한 남자 시신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어둠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오른쪽 뺨이 차가운 땅에 닿게 엎드려 놓인 시신.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밤하늘이 조금씩 밝아올 무렵, 누군가 그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2000년 3월 7일 새벽, 전남 완도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발생한 일이다.
사망자는 완도읍에 사는 김아무개(52)씨. 뇌성마비로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인이다. 시신 주변에선 방향등 등 자동차 파편이 발견됐다. 원래 그곳에 있었는지, 범인이 교통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뿌렸는지 알 수 없다.
시신에 큰 외상은 없었다. 경찰은 김씨의 가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큰딸 김신혜(당시 만 23세), 둘째 김종현(가명. 남. 19), 막내 김수현(가명. 여. 18)이 그들이다. 아내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다.
3월 8일 자정께, 큰딸 김신혜는 고모부와 함께 완도경찰서로 향했다. 김신혜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당시 작성된 신문조서 한 부분은 이렇다.
피의자(김신혜)는 다른 사람을 죽인 사실이 있나요?
“예“
누구를 죽였나요?
“저의 친아버지 김OO을 죽였습니다.”
조서는 김신혜가 술에 수면제를 타 아버지를 살해한 것으로 정리된다. 경찰의 사건 조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김신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작성한 조서내용을 부인한다.
“저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장은 인정되지 않았다. 검찰은 존속살해와 사체유기 혐의로 김신혜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같은 해 8월 31일, 법원은 그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15년이 흘렀다. 사죄, 반성, 성찰을 해야 할 시간. 그녀는 이제 죄를 인정할까?
“반성이요? 내가 죽이지 않았는데, 무슨 반성을 하란 말입니까. 저는 가석방, 감형도 바라지 않아요. 죄가 있어야 가석방을 위한 노력을 하죠.“
15년 동안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지치고 포기할 법도 한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기수 김신혜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2014년 여름, 박준영 변호사가 청주여자교도소에서 김신혜를 접견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김신혜 “저도 인권 가진 사람인가요?”
“만약 우리 아버지가 장애인이 아니었어도, 그 사람들(경찰)이 우리 아버지 (시신을) 함부로 다뤘을까요? 우리 아버지가 서민이 아니라 재벌, 정치인이었어도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겠냐고요. 내가 만약에 장애인, 서민 딸 아니고 재벌, 정치인의 딸이었어도 날 그렇게 함부로 재판할 수 있었을까요?
무죄추정의 원칙? 그런 거 다 속였어요. (중략) 진실은 그 순간을 떠나면 알기 힘들어요. 누군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난 죽이지 않았다, 진실 알아달라’고 하면, 나도 100% 믿는다고 말 할 자신 없어요. 나, 그런 거 기대하는 거 아니에요. 내 결백 믿어달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하늘한테만 인정받으면 돼요. (진실은) 내가 아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니까.
근데, 나는 도대체 뭔가요? 내가 대한민국 국민인지, 아닌지 꼭 알고 싶어요. 꼭 인정받고 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어요. 나한테도 인권이 있는지 없는지, 나 그거 알고 싶어요. 확인하고 싶다고요! 나 인간 맞냐고요. 나 인간으로서 인권 가진 사람 맞아요? 그럼 어떻게 그런 수사를 할 수 있어요?”
김신혜의 ‘절규‘를 들었으니, 이번엔 법원의 판결문을 보자. 수사기관과 법원이 사건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
수사기관과 법원 “범인은 김신혜“
“피고인(김신혜)은, 아버지인 피해자 김OO이 피고인이 어렸을 때부터 피고인의 어머니와 이혼한 후 술을 마시면 때때로 피고인과 여동생을 성적으로 학대한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아버지 김OO을 보험계약자로 하여 교통사고상해보험 등 8개의 보험에 가입한 후 피해자에게 수면제와 알콜을 섞어 마시게 하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하고. 이를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보험금 약 8억 원을 타내기로 마음 먹었다.
피고인은 2000년 3월 7일 01:00시경 아버지 김OO의 집에서 미리 준비한 양주와 수면제 약 30알을 피해자에게 건네주며 ‘간에 좋은 약’이라고 속여 한꺼번에 먹게 한 후 승용차 조수석에 태워 완도읍 일대를 돌아다님으로써 같은 날 03:00시경 승용차 안에서 사망에 이르게 하여 피해자를 살해했다. 피고인은 같은 날 04:00시경, 살해한 피해자를 집에서 약 6km 정도 떨어진 OO리 버스승강장 앞길에 버려 사체를 유기했다.”
법원은 수사기관의 조사결과를 그대로 인정했다. 자, 어떤가. 15년 동안 무죄를 주장하는 무기수의 목소리와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법원 판결문, 어느 쪽이 사실일까.
법원의 판단이 맞다면 김신혜는 아버지를 죽이고도 반성하지 않는 악마다. 김신혜 주장이 맞다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국가가 악마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 오해는 쉽고, 증명은 어려운 법이다. 여러 형사사건에서 피고인들의 허위자백을 밝혀내 무죄를 이끈 박준영 변호사와 함께 경찰–검찰의 수사기록, 공판기록, 현장검증 사진, 김신혜의 편지 등 약 2000페이지에 이르는 기록을 살폈다.
그런 다음 지난 1월 15일 새벽 4시, 차를 몰아 사건이 발생했던 전남 완도로 향했다. 15년 전,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났다. 완도를 빠져나올 땐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우린 마지막으로 사건 현장을 찾았다.
시신이 버려진 그날처럼 사방은 어둡고 적막했다. 바다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오가는 사람, 차는 없었다. 가로등이 여전히 좁은 땅을 밝히고 있었다. 가로등은 범인을 봤을 거다. 범인은 김
신혜일까, 아닐까. 한 명일까, 아니면 두 명 이상일까.
“이제 감이 좀 와요? 이거 완전히 조작이라니까!”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박 변호사가 말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건 이야기, 이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