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의 헌법, 유신 헌법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느닷없이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유신 체제는 박정희가 사실상 영구 집권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10·26사건(1979년)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민주주의는 철저히 짓밟혔다.
그러나 김기춘에게 유신 체제 7년은 좋은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김기춘은 법무부 간부가 된 데 이어 중앙정보부의 요직을 꿰찼고, 청와대 근무도 경험했다. 박정희와 그 심복 신직수의 총애를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잘나갔다. 나이도 33세(1972년)에서 40세(1979년), 즉 신체적으로도 아직은 한창때라고 볼 수 있었다.
김기춘의 인생에서 1차 전성시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호시절. 김기춘에게 유신 체제 7년은 그런 시절이었다.
김기춘의 1차 전성시대는 유신 헌법이라는 ‘괴물’의 탄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신 헌법은 한국의 역대 헌법 중 최악이었다.
몇 가지만 살펴보면,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를 주권적 수임 기구로 명시하며 주권재민 원리를 부정했다. 3권 분립도 부정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은 ‘통대’에서 뽑게 했는데, 이건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이 방식으로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들이 모인 교섭 단체가 유신정우회, 즉 유정회다).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국회의 국정 감사권은 박탈하는 것 등을 통해 국회를 무력한 존재로 전락시켰다.
또한 악명 높은 긴급 조치권을 대통령에게 광범위하게 부여해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법관 추천 회의제를 폐지해 대통령이 모든 법관의 임명 및 재임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법부 독립도 가로막았다. 구속 적부심 제도를 폐지하고, 고문 등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처벌할 수 없다는 조항도 삭제했다. 아울러 입후보 조항 등을 조정해 사실상 박정희만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1969년 부산지검에서 서울지검으로 올라온 검사 김기춘은 1971년 8월 법무부 법무과로 옮겼고, 이듬해 유신 헌법을 만드는 데 관여했다. 그런데 유신 헌법 제작 과정에서 김기춘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한태연 “신직수·김기춘이 유신 헌법안 주동”
“욕은 우리가 다 먹고, 만든 사람은 다 빠져버렸다.”
헌법학자 한태연은 2001년 12월 8일 한국헌법학회가 개최한 ‘역사와 헌법’ 학술 대회에서 유신 헌법과 관련해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한태연 자신과 갈봉근(유신 쿠데타 당시 중앙대 교수)을 가리킨다.
한태연과 갈봉근은 유신 독재를 법률로 뒷받침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혀왔다. 두 사람 모두 유신 체제에서 유정회 소속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한태연은 1963년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이 된 것을 포함해 박정희 집권기에 3번이나 금배지를 달았다.) 그렇지만 세간에서는 유신 헌법 제작에 앞장선 어용 지식인이라는 따가운 비판을 오랫동안 받았다.
그것에 대해 한태연이 2001년 억울하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한태연에 따르면, 유신 쿠데타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와서 갔더니 박정희가 메모를 꺼냈다고 한다.
“이건 내가 만든 것”이라며 박정희가 “이 안을 헌법학자들한테 맡기려고 했으나 보안 관계로 맡기지 못하고 법무부에서 작성한 것인데, 내용은 헌법 제정에 대한 내 구상이다”라면서 법무부에 가서 작업을 도와주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박정희가 설명한 권력 구조의 핵심이 ‘통대’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것과 긴급 조치권이었다고 한태연은 밝혔다.
박정희 지시에 따라 한태연은 갈봉근과 함께 법무부에 갔다. 그런데 “신직수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는 것. “장관이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며 “이게 내가 관여한 전부”라고 한태연은 주장했다. 그러면서 “헌법안을 보니 몇 개 조항은 국민의 지탄을 받을 만한 사항임을 직감했으나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아울러 유신 쿠데타 전에 박정희 정권이 “김기춘 과장을 파리에 보내 1년 동안 드골 헌법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도록 했다”는 주장도 했다.
한태연의 주장을 요약하면, 박정희가 유신 헌법의 핵심 내용을 구상하고 신직수와 김기춘이 그 뜻을 받들어 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원하는 형태로 유신 헌법안을 만든 주동 인물 중 한 명이 33세의 젊은 검사 김기춘이라는 주장이다.
김기춘의 반박 ‘난 평검사였을 뿐‘
“착오가 있는 것 같다.”
2001년 국회의원이던 김기춘은 한태연의 주장이 나온 직후 두 측면에서 반박했다. 자료 수집을 위해 파리에 간 일이 없고, 당시 자신은 과장이 아니라 평검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시기에 “장관이 여러 검사들에게 자료 조사나 스터디를 맡겼”으며 자신이 한 일은 “프랑스에서는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 등에 대해 조사하고 스터디해 보고하는 정도 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한태연이 유신 헌법안 작성 책임을 신직수와 김기춘에게 떠넘기려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이 가능성은 적다. 2001년 12월 8일 학술 대회 자리에서 한태연이 “(19)70년대를 무사히 넘긴 것은 유신의 덕”이라고 강변한 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유신 헌법안 작성 책임은 남에게 떠넘긴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와 별개로, 유신 체제와 관련해 한태연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을 “자구 수정” 문제 정도로 한정할 수는 없다. 한태연과 갈봉근은 유신 체제를 위해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다. 유정회 의원으로 거듭 낙점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한태연의 진술에는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 김기춘의 과장 진급이 확인되는 시기는 유신 쿠데타 후 반년이 지난 때다. 2001년에 85세의 고령이던 한태연이 김기춘의 당시 직위를 잘못 기억한 것 아닌가 싶다. 또한 유신 쿠데타 전 박정희 정권 쪽에서 스페인, 대만 등에 사람을 보내 대만의 장제스식 총통제, 스페인의 프랑코식 총통제, 프랑스의 드골식 대통령제를 연구하게 한 건 널리 인정되는 사항이지만, 그 목적으로 김기춘을 파리에 보냈음을 확증할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태연의 주장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유신 헌법과 관련해 김기춘은 적어도 자신이 해명한 것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유신 헌법 제작 3단계.. 김기춘, 2·3단계 관여
1971년 12월 6일 박정희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뒤이어 그것을 뒷받침할 국가보위법이 국회에 제출돼 그해 12월 27일 야당이 배제된 상태에서 제정됐다. 국가 비상사태 선언과 국가보위법 제정 강행은 유신 쿠데타의 전조(前兆)였다. 이를 통해 박정희는 막강한 비상대권을 확보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광범위하게 제한할 수 있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큰 위협에 직면했지만, 박정희는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 자체를 부정하는 새로운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유신 헌법 제작 과정을 중심으로 유신 쿠데타를 되짚어보면 큰 틀에서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의 핵심은 유신 체제 전반에 관한 그림을 그리며 쿠데타의 마스터플랜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1972년 5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비밀리에 방북(5월 2~5일)하고 나서 얼마 후 1단계 작업이 시작됐다. 김종필을 비롯한 주요 여권 인사 및 중앙정보부 간부 대다수에게도 숨길 정도로 작업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작업 장소는 궁정동 중앙정보부 밀실. 7년 후 10·26사건으로 유신 독재가 처참하게 막을 내리는 바로 그곳이다.
중앙정보부 부국장을 중심으로 한 실무 팀이 궁정동 밀실에서 작업한 결과는 박정희,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의 3인 회의로 넘어갔다. 여기서 검토해 다시 실무 팀에 지침을 내리는 식이었는데 청와대 정무비서관 홍성철, 유혁인 등도 때때로 검토 작업에 참여했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관여했지만, 유신 체제의 골격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1단계 작업이 은밀히 진행되던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나 박정희 세력에겐 유신 쿠데타로 가는 교두보일 뿐이었다. 분단 해소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던 그때 박정희 세력은 유신 쿠데타를 위한 물밑 작업에 한층 박차를 가했다.
그러면서 2단계로 넘어가는데, 이때 김기춘의 이름이 등장한다. 김충식에 따르면 1972년 8월 무렵 유신 쿠데타의 마스터플랜이 마무리되면서 신직수,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 등이 새 헌법 골격을 짜기 시작했다. 이때 “실무자는 검사 김기춘 등”이었으며 “유신 헌법과 새 법령 정비, 포고령 정비가 모두 이들 팀에 의해 준비되었다”고 김충식은 썼다. 눈여겨볼 사항 중 하나는 김기춘, 신직수, 김치열 모두 법조인이라는 점이다. 이때쯤 되면 법 기술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단계에서는 공개적으로 유신 헌법안을 제작하는데, 이때도 김기춘의 이름이 등장한다. 유신 쿠데타 직후 헌법을 조문화, 법제화하는 작업을 진행한 것은 법무부의 헌법심의회였다. 헌법심의회는 신직수를 비롯한 몇몇 장관과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됐고 검찰에서 엘리트로 꼽히던 몇몇 검사를 실무진으로 차출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김기춘이다.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신직수가 말했다는 한태연의 2001년 주장은 헌법심의회와 관련돼 있는데, 이경재(유신 쿠데타 당시 정치부 기자)의 취재 결과와 일치한다. 이경재는 헌법심의회 작업 과정에서 신직수가 “이 헌법의 기본 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주문했다고 <유신 쿠데타>(1986년 발간)에 썼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유신 헌법안이 비상국무회의에 올라간 때는 1972년 10월 27일. 공식 발표만 놓고 보면, 유신 쿠데타 후 불과 10일 만에 새 헌법안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명색이 헌법인데, 날림으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열흘 만에 헌법안을 뚝딱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기 훨씬 전부터 김기춘 같은 법 기술자들이 물밑에서 헌법안에 관한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했을 것임을 말해준다.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김기춘 회고가 말해주는 것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내용이 2009년에 발간된 김기춘 회고록에 나온다. 회고록에서 김기춘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72년 9월경”이라며, 유신 헌법 관련 외국 자료를 연구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밝혔다.
얼핏 보면, 2001년 김기춘이 한태연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밝힌 내용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해외 사례 조사·연구·보고라는 점은 다르지 않지만, 놓쳐서는 안 될 지점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보고했느냐 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건 가벼이 여길 사항이 아니다.
우선 이 시기에 김기춘은 평검사였다. 평검사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통상적인 경우라면, 대통령은 고사하고 장관에게 직접 보고할 일도 별로 없는 게 평검사다. 평사원이 재벌 회장에게 직접 보고할 일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는 것은, 더욱이 대통령이 은밀히 진행하는 작업과 관련해 그렇게 했다는 것은 김기춘이 스스로 해명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했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게 아니라면, 보안을 강조하며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한 최고 권력자가 그 작업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은 평검사를 불러 직접 보고하게 했다는 것인데 그건 상당히 어색한 설명이다.
두 번째, “1972년 9월경”이라는 시점도 눈길을 끈다. 신직수 등이 새 헌법 골격을 짜기 시작한 때로 거론되는 “8월 무렵”과 유신 쿠데타가 일어나는 10월 사이다. 박정희가 중간보고를 받으며 쿠데타 준비에 박차를 가했을 시기다. 그런 시기에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라면 실무진에서 비중이 낮은 사람일 가능성은 적다. 이 시기에 김기춘 등이 실무를 맡은 팀이 유신 헌법, 새 법령 및 포고령 정비를 모두 준비했다는 김충식의 서술도 이를 뒷받침한다.
세 번째, 평검사에게 직접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박정희가 이 문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궁정동 밀실에서 유신 쿠데타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하기 훨씬 전부터 박정희는 유신 체제 같은 독재 체제 구축을 꿈꿨다. 일본 군국주의 장교들의 2·26쿠데타(1936년 2월 26일 일부 극우 청년 장교들이 병력을 동원해 몇몇 대신을 죽이고 ‘쇼와 유신’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건)에 심취한 박정희는 유신 독재 시기에 내세운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다르지 않은 체제의 필요성을 5·16쿠데타(1961년) 이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유신 체제 구축은 박정희의 오랜 염원이었다. 궁정동 밀실에서 진행된 작업을 지속적으로 점검한 것도, 유신 체제의 골격을 만드는 데 핵심 역할을 한 것도, 평검사 김기춘에게 직접 보고를 받은 것도 그 점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지극히 위험하고 왜곡된 신념이었다는 것이다.
김기춘은 신직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평검사인 김기춘을 박정희가 어떻게 알고 직접 보고를 받게 됐을까? 여기서 주목할 사람이 신직수다. 신직수는 법 기술자로서 김기춘의 선배 격인데(김기춘보다 열두 살 위), 김기춘과 달리 서울대 출신도, 고시 합격자도 아니고 군 법무관을 했을 뿐이었다. 법조계의 주변부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신직수의 인생을 바꾼 건 군 시절 박정희와 맺은 인연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법 기술자가 필요했던 박정희 세력은 예전에 박정희 밑에서 군 법무관으로 일했던 신직수를 불러들였다.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에 무소불위의 힘을 부여한 중앙정보부법을 만드는 데 관여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 고문을 거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됐다. 1963년 12월에는 불과 36세의 나이에 검찰총장이 됐다. 7년 6개월 동안 검찰총장으로 일한 신직수는 1971년 6월 법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신직수의 초고속 출세는 박정희와 맺은 개인적 인연, 그리고 법을 활용해 최고 권력자에게 바친 충성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1970년대에 신직수는 옮기는 곳마다 김기춘을 데려갔다. 신직수 법무부 장관 취임 두 달 후 김기춘은 법무부로 발령을 받았다. 1973년 12월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이 되는데, 얼마 후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였다. 유신 말기 신직수가 청와대에 근무하게 됐을 때에도 김기춘은 신직수 밑에서 일하게 된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따라다닌 김기춘은 신직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초임 검사 시절부터 출세 지향 의식을 강렬하게 다진 김기춘이 미래를 설계하는 데 주요하게 참조한 준거 중 하나가 신직수 사례 아니었을까?
신직수는 김기춘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꼽힌다. 김기춘이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하고 그러면서 박정희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신직수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에 더해 박정희–신직수–김기춘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끈이 있었다.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다. 5·16쿠데타 세력이 김지태를 강압해 재산을 넘기게 만드는 과정에서도 신직수는 상당한 역할을 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5·16장학회가 키운 ‘인재’ 중 한 명이 김기춘이다.
“유신 공로, 유례없이 발탁”.. 선배들 제치고 파격적 승진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기춘은 유신 헌법 제작 과정에서 적어도 본인이 해명한 것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김기춘이 한 역할을 속속들이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신 쿠데타 세력이 워낙 은밀하게 작업을 진행했고,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기록 또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나, 한태연의 2001년 주장과 김기춘의 반박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분명해 보인다.
유신 헌법 제작 관여 후 김기춘은 1972년 12월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에 실린 글(‘유신 헌법 해설’)에서 유신 헌법을 비호했다. “유신 헌법 기초에 참여”한 데 이어 “TV에 나와 명해설”을 해 이름이 났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유신 헌법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유신 헌법 제작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사람에게 해설과 홍보를 맡긴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신 정권은 김기춘에게 파격적인 승진으로 보상했다. 1973년 4월, 유신 쿠데타 후 첫 번째로 이뤄진 대규모 검찰 인사에서 김기춘은 법무부 인권옹호과장 겸 서울고검 검사로 발령을 받았다. ‘인권 옹호’는 김기춘의 삶과 여러모로 엇박자이지만, 이 인사에서 김기춘에게 의미 있게 다가간 것은 ‘인권 옹호’가 아니라 ‘과장’이었을 것이다.
<중앙일보>(1973년 4월 3일 자)는 이 인사와 관련, “유신 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된 정해창 (법무부) 검찰과장(고시 10회)과 김기춘 인권옹호과장(고시 12회)”이라고 보도했다. 임관한 지 10년도 안 된 검사 김기춘이 부장 검사급인 법무부 과장으로 승진한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기사다.
그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유례없이 발탁”이라는 대목이다. 김기춘에 대해서는 서울대 법대 및 고시 2년 선배인 정해창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만으로도 그 표현을 충분히 쓸 수 있다. 정해창이 “임관 후 고시 10회 동기생들을 제치고 선두만 달린 실력파”, “검찰청 개청 이래의 천재”로 보도될 정도의 엘리트이자 훗날 “미스터 검찰”로 불리며 법무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게 되는 사람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유례없이 발탁”에는 정해창도 포함된다. 그건 이때 부장 검사급으로 승진한 사람들이 주로 고시 8회였기 때문이다. 즉 이 인사에서 김기춘은 동기들을 앞서가는 정도가 아니라, 두 기수 위 선배들 가운데 선두 주자 및 네 기수 위 선배들과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초고속 승진의 발판이 될 만한 다른 엄청난 공로(예컨대 마피아급 범죄 조직을 일망타진했다거나)라도 세웠던 것일까? 그런 건 찾아볼 수 없다. 이 시기 김기춘의 활동 가운데 도드라진 건 역시 유신 헌법 관련 활동이다. 초고속 승진은 유신 헌법과 관련해 김기춘이 한 역할이 어느 정도 비중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유신 독재와 함께 막을 올린 김기춘의 1차 전성시대
유신 독재는 그렇게 김기춘에게 1차 전성시대를 열어줬다. 그래서일까. 김기춘은 회고록에서 유신 쿠데타가 박정희의 “우국충정”의 소산이며 “국론을 통일하여 국력을 결집하고 정부 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강변하며 다시 한 번 유신 독재를 비호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사안이 있다. 김기춘은 유신 헌법 관련 작업에 어떠한 자세로 임했을까? ‘동의하지 않지만 출세를 위해 적극 나섰다’와 ‘마음 깊이 공감할 뿐만 아니라 출세의 지름길이기에 흔쾌히 동참했다’, 둘 중 어느 쪽일까?
전자라면 유신 독재 붕괴 후 반성하거나 다르게 살아가려는 모습이 부분적으로라도 나타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유신 헌법안 작성을 주동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지목됐을 때 김기춘이 부인한 것은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신 독재 시기에 대해 김기춘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박근혜가 김기춘을 중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자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김기춘에게 유신 헌법 제작에 관여하고 유신 체제를 위해 일하는 것은 초고속 출세로 이어지는 길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신의 위험한 신념과도 부합하는 길이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유신 독재 시기는 김기춘에게 좋은 시절일 뿐만 아니라 보람찬 시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와 평등, 정의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거대한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