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 시기
중앙정보부장 법률 보좌관
법무부 과장 승진(1973년 4월) 1년 후인 1974년 4월 김기춘은 중앙정보부장 법률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정보부로 김기춘을 이끈 사람은 1973년 12월 이후락의 후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된 신직수였다.
신직수가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일 무렵 중앙정보부의 당면 과제는 유신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을 짓밟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정권 차원에서 대규모 공안 조작 사건을 1974년 4월 터트리게 된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973년 10월부터 유신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12월 24일에 시작된 개헌 청원 100만 인 서명 운동이 여론의 호응을 얻으며 확산됐다. 그러자 1974년 1월 8일 유신 정권은 긴급 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유신 헌법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면 영장 없이 구속해, 민간 법정도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최고 징역 15년형을 선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에 이어 그해 4월 3일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일으키는 한편 긴급 조치 4호를 발표했다. 긴급 조치 4호는 위반자가 나오면 그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으름장과 함께 최고 형량도 사형으로 높였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면 말 그대로 죽여버리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이것은 질 낮은 협박으로 그치지 않았다.
유신 독재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과 연결해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까지 고문으로 조작해 이듬해(1975년) 끝내 8명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사법 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2012년 대선 후보 박근혜가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는 궤변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사건이기도 하다.
‘유신 독재 최대의 조작극’으로 불리는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유신 정권 쪽 인사로 대통령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대법원장 민복기, 수사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이 꼽힌다.
이들은 1차 인혁당 사건(1964년), 즉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조차 ‘증거가 불충분해 기소할 수 없다’며 버텼지만 윗선에서 무리하게 기소를 강행했던 그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1964년 당시 신직수는 검찰총장, 민복기는 법무부 장관, 이용택은 사건을 담당한 중앙정보부 5국 대공수사과장). 2차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1차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도 훗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박정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직접 챙겼다. 이와 관련, 이용택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일주일에 두 번꼴로 보고를 했”다고 밝혔다. 1972년 자신의 주요 관심사였던 유신 헌법 제작 과정에서 박정희가 평검사 김기춘에게 직접 보고를 받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풍경인데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도 아닌 국장에게, 그것도 일주일에 두 번꼴로 보고를 받은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유신 독재 정권이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관계자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과정은 김기춘과 무관하게 전개된 것일까? 그 과정에서 김기춘이 특정한 역할을 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는 현재 찾아볼 수 없다. 김기춘은 이 사건 수사 책임자가 아니기도 하다.
그렇지만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관계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최대 역점 사업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공산주의자들이 ……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 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 조직”으로 몰아간 것이 말해주듯이, 유신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비상보통군법회의(1심) 공판은 김기춘이 중앙정보부장 법률 보좌관으로 있을 때 진행됐다.
중앙정보부장 법률 보좌관은 그런 사건과 관련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아도 무방한 자리였을까? 이 사건이 전개되는 동안 중앙정보부장 법률 보좌관으로서 김기춘은 어떤 업무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김기춘이 말하는 문세광 신문의 그날
중앙정보부로 옮긴 후 김기춘의 활동 내용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시기는 그해 8월이다. 계기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울린 총성이었다. 대통령에게 총탄이 날아가고 그 와중에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 등이 절명한 사건이었다. 김기춘은 재일 교포 문세광을 신문해 자백을 받아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1월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김기춘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사건 후 문세광은 그다음 날(8월 16일) 오후 5~6시까지 계속 묵비했다고 한다. 그러자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문세광이 말문을 열도록 신문해보라’고 김기춘에게 지시했다.
피의자들이 첫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면 계속 답변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 김기춘이 단도직입적으로 “<자칼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었느냐”고 묻자, 문세광이 “선생님도 읽었느냐”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김기춘이 “너가 자칼이 아니냐?”, “남의 나라 대통령을 저격하러 온 사람이 비겁하게 묵비만 하고 있으면 되느냐”고 추궁하자 문세광이 그날 밤 전모를 거의 다 얘기했다는 것.
김기춘은 이 사건의 최종 수사 결과 발표는 이때 문세광이 자신에게 털어놓은 얘기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거의 그대로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수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의 수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다.”
<자칼의 날>은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암살 기도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김기춘은 1974년 8월 4일 대천 해수욕장에서 휴가를 보낼 때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2013년 3월 부산일보에 실린 인터뷰). 그로부터 12일 후 문세광을 신문할 때 이 소설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의문투성이 8·15 저격 사건
김기춘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8·15 저격 사건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그 의문들 중 주요한 몇 가지, 그리고 수사 결과 발표에 담기지 않은 사항과 정치적 파장 등을 짚어보자.
먼저 살펴볼 건 배후에 대한 빠른 발표다. 사건 이틀 후(1974년 8월 17일),수사본부는 “문세광의 사실 폭로에 의하여 그 배후 관계가 밝혀졌”다며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만경봉호의 “북괴 공작 지도원”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 김호룡이 배후라는 발표였다.
‘북한→조총련→문세광’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에 의해 범행이 자행됐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김호룡을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문세광이 털어놓았다는 얘기를 바탕으로, 김기춘의 문세광 신문 다음 날 이뤄진 발표였다.
이와 달리 일본 측은 김호룡이 문세광의 저격을 사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며 단독 범행 쪽에 무게를 실었다. 범행 동기로는 문세광이 유서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 8월 8일) 등을 거론하며 1인 독재 타도가 “한국 혁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을 주목했다.
일본 측은 김호룡에 대해 강제 수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이는 2005년 이 사건을 다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도 확인된다. 김호룡은 MBC 측에 이 사건과 관련해 일본 측으로부터 어떤 수사도 받은 적이 없고 자신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김기춘은 2005년 CBS 인터뷰에서 “교사자” 등에 대해 일본 측이 “국가 책임과 연결되는 미묘한 문제니까 수사를 소극적으로 하다가 그 후에는 아예 안 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수사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지적이긴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정치적 고려를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일본뿐일까라는 의문이 함께 들게 만드는 대목이다.
배후와 관련해 ‘북한→조총련→문세광’이라는 발표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확실하다”는 김기춘의 믿음과 달리, ‘북한→조총련→문세광’이라고 다수가 인정할 만한 확실한 물증이 지금까지 제시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총탄 문제를 살펴보자. 육영수 여사 등을 절명케 한 총탄이 누구 총에서 발사됐는가, 이 문제다. 사건 당시 수사본부의 일원이었던 전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는 1989년 월간 <다리>에 실린 글에서 숱한 은폐와 조작이 수사 과정에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그 후 한겨레(1989년 8월 29일 자) 인터뷰에서 이건우는 발사된 총탄과 탄흔의 수가 일치하지 않는 점 등을 지적하고, 검찰 기소와 판결 과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이 왜곡되거나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육영수 여사는 절대로 문세광의 총탄에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005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총성 분석 등을 통해 이 문제를 검증했다. 검증 결과의 핵심은 육 여사의 목숨을 빼앗은 총탄이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이라고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CSI 같은 과학 수사물 등에 자주 나오는 총탄 검사를 통해 해소할 수 있는 의혹이다. 문제는 그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건우는 탄두를 회수해 누구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 가려야 할 사건 직후에 청와대 경호실에서 이례적으로 탄두를 모두 쓸어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고 증언했다. 육 여사를 절명케 한 총탄은 그 후 공개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권총 입수 경위, 수사를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에 더해 이례적으로 빠른 처형(대법원 판결 3일 후 사형 집행) 등 적잖은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의문점이 많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어떻게 권총을 지닌 채 행사장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건 당일 청와대 경호실 요원뿐만 아니라 경찰 등 수백 명이 행사장을 지키며 출입을 통제했다. 그런데도 문세광은 권총을 지닌 채 유유히 국립극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건, 비표가 없는 문세광을 한 경찰이 검문하려 하자 경호실 관계자가 나서 “장관을 만나러 온 사람”이라고 얘기하면서 문세광이 검문을 피하게 해줬다는 점이다.
경호실은 이 사건 이전에 과잉 경호 논란을 거듭 불러일으켰다. 장관, 도지사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안하무인 행태로 원성을 자초한 경호실을 대통령이 비호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랬던 경호실이 8·15 저격 사건 당일에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앙정보부와 관련된 의문도 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따르면, 일본에 파견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이 사건 전에 이미 문세광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문세광을 요주의 인물로 봤다는 말이다. 그런 문세광이 권총과 탄환을 지닌 채 입국해 국립극장에서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중앙정보부는 무엇을 한 것일까라는 의문이다.
몇 가지 의문점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사건에는 단독 범행 쪽에 무게를 싣는 결론 또는 ‘북한→조총련→문세광’에 의한 범행이라는 결론으로는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여러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의혹들을 해소할 수 있을 정도로 수사가 이뤄졌다면 배후를 비롯한 이 사건의 전모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른 설명이 제시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수사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김기춘 신문 전까지 문세광 묵비? 그렇게 보기 어려운 이유
이쯤에서 김기춘의 문세광 신문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기춘은 사건 다음 날 오후 5~6시까지 계속 묵비하던 문세광의 말문을 자신이 열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문세광 신문은 김기춘 소개 기사 등에 주요 공적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항이다.
“날고 긴다는 중정 요원들이 24시간 수사해도 입을 열지 않은 문세광”을 “준비된 자” 김기춘이 신문해 입을 열게 만들었고 그것은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고 영웅담을 쓴 경우도 있다.
문세광이 계속 묵비했다는 김기춘의 이야기는 사실일까? 김기춘이 신문하기 전에 김일두 수사본부장이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중간 수사 결과가 1974년 8월 16일 자 신문에 보도됐다.
그걸 보면 문세광이 여권과 비자를 어떻게 확보했는지, 돈은 얼마나 가지고 들어왔는지, 어떤 학교를 나와 어느 회사에서 일했는지, 가족은 어떤 일을 하며 부친은 무슨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등 구체적인 사항이 많이 나온다. 일본에서 열린 김대중 강연회 등에 10여 회 참석하고 나중에는 김대중 구출위원회 간부를 맡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한 내역도 포함돼 있다.
문세광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면 수사본부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할 수 있었을까? 사건 전부터 중앙정보부에서 문세광에 대해 파악하고 있던 사항을 가져다가 그대로 발표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수사본부의 발표 내용은 그 수준을 넘어선다.
이 점은 김일두 수사본부장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때 김 본부장은 “지금까지의 수사에서 범인 문(세광)은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조총련 계열의 범행이 아닌가 보고 범행 동기, 배후 등에 대해 집중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수사본부 발표에는 ‘총기 입수 경위 등에 대해 문세광이 이러저러하게 진술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김기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수사본부가 문세광의 진술을 창작해 허위 발표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이에 대해 한홍구 교수는 김기춘이 신문하기 전에 “문세광이 이미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진술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도 인정한 김대중 납치와 8·15 저격의 연관성
1974년 8월 17일 수사본부가 발표한 수사 결과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괴 공작 지도원”과 조총련 간부 김호룡을 배후로 지목한 것 이외에 이 발표에서 눈길을 끄는 또 다른 사항은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 나온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 문세광의 김대중 구출위원회 활동 등이 포함된 것과 대조적이다.
문세광의 이력을 살펴보면, 김대중의 일본 활동 및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된 부분의 비중이 낮다고 하기 어렵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한 분노가 문세광의 범행 동기에서 가장 큰 부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8·15 저격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과 무관하다고 보는 건 무리다.
두 사건의 관련성은 박정희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박정희 처남 육인수는 1987년 <신동아>에 이렇게 밝혔다.
“(육 여사)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 각하께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런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시면서 굉장히 비통해 했다.”
이처럼 두 사건이 연결돼 있었는데도 1974년 8월 17일 수사 결과 발표 전문(全文)에는 ‘김대중’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김대중을 납치한 것이 대통령 직속 기관인 중앙정보부였다는 점이다. 중앙정보부는 납치를 넘어 사후 은폐 및 보도 통제를 통한 진상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납치 사건은 김대중 자작극’이라는 얘기가 퍼지도록 조종했다.
자기들이 납치해놓고 ‘피해자가 꾸민 사기극’이라는 흑색선전까지 한 것은 정권 안보를 가장 우선시하는 정보 기관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러한 사건이 8·15 저격 사건과 관련돼 비중 있게 거론되는 것을 유신 정권이 원했을까?
다른 하나는 두 사건의 관련성이 부각될 경우 8·15 저격 사건의 처리 방향이 유신 정권이 원치 않는 쪽으로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두 사건의 관련성이 부각될수록 일본에 책임을 강하게 묻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수세였던 유신 독재, 8·15 저격 사건 계기로 공세로 전환
그 이후 전개 과정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한국 측은 일본이 사죄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세광이 일본에 살았고, 일본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을 사용했으며, 조총련을 일본 정부가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생긴 일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일본 측은 8·15 저격 사건을 김대중 납치 사건과 연계해 바라봤다. ‘한국 청년 문세광이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을 일으킨 유신 독재에 분노해 저지른 범행 아니냐. 그게 왜 우리 책임이냐’, 이런 논리였다.
일본 측 태도는 반일 감정을 격화시켰다. 곳곳에서 반일 시위가 열렸다. 배후가 북한과 조총련이라는 발표 후 시위에서는 “일본은 반성하라”와 함께 “김일성 처단”, “조총련 불법화”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다. 반공 시위이기도 했던 반일 시위는 유신 독재 강화에 도움이 됐다.
그러한 가운데 한일 간 교섭이 전개됐다. 줄다리기 끝에 사건 다음 달(1974년 9월) 시이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특사로 한국을 찾았다. 김대중 납치 사건 후 김종필 총리가 일본에 가서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전한 것과 반대로, 이번엔 시이나 에쓰사부로 특사가 한국에 와서 박 대통령에게 일본 수상의 친서를 전달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수세에 몰려 있던 유신 정권이 8·15 저격 사건을 계기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으로 이 문제에 대한 교섭은 일단락된다.
8·15 저격 사건은 유신 권력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경호실장이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고, 22세의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국정 전면에 등장했다. 유신 독재가 말기에 극심한 혼돈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차지철과 박근혜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되짚을 때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다. 사건 당시 안타깝게 희생된 사람은 육 여사만이 아니었다. 합창단원 자격으로 경축 노래를 부르기 위해 참석했던 여고생 장봉화도 총탄(경호실 요원 쪽에서 잘못 쏜 총탄으로 알려져 있다)에 희생됐다.
국가 행사에 불려 왔다가 그렇게 됐지만 공식 보상은 없었다. 2005년 장 씨 유가족은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성금의 일부는 받았으나 피격 사건 이후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받은 보상은 아무것도 없다”고 밝혔다. “사건 당시 경황도 없었고 법률적인 지식도 없어 보상 문제는 생각도 안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국가에서 먼저 나섰어야 하지 않을까?
막강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영전
문세광 신문은 김기춘에게 엄청난 출셋길을 열어줬다. 문세광 신문 한 달 후인 1974년 9월,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영전했다. 유신 헌법 제작 관여 후 선배들마저 제치고 법무부 과장으로 진급한 것에 이어 1년여 만에 또다시 초고속 출세를 한 것이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영전은 법무부 과장이 된 것보다 훨씬 의미가 컸다. 무소불위로 통하던 중앙정보부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던 대공수사국장 자리는 법무부 과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극우 반공주의에 찌든 사회였기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의 힘은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자리이기도 했다.
최고 권력자의 뜻에 따른 인사였다는 점에서도 김기춘에게는 의미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춘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문세광에게 자백을 받아내자 박정희 대통령이 “김기춘 검사가 수사 실력이 탁월하니 대공수사국장으로 임명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썼다.
“중정 역사상 최연소(만 34세 10개월) 수사국장으로 중책을 맡았다.”
김기춘의 1차 전성시대는 8·15 저격 사건을 계기로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일가의 눈에는 김기춘이 아내 또는 어머니의 원혼을 달래준 인물로 비치지 않았을까? 최고 권력자 일가와 맺은 이러한 관계는 유신 독재 시절 김기춘에게 든든한 배경이 된 것을 넘어, 박근혜 정권에서 김기춘이 또다시 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는 데에도 힘이 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