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특명 받아 보안사를 몰아치다
“국군 장병 2명 북괴에 피랍.” 1977년 10월 26일 주요 신문 1면에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됐다. 이날 유엔사는 6일 전 북한군이 비무장 지대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측 지역에 침투, 전방 부대 대대장인 유운학 중령과 그 부하인 무전 통신병을 납치했다고 발표했다.
26일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에서 유엔사는 납치된 한국군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북한은 한국군 2명이 제 발로 왔다고 반박했다. 유엔사는 ‘조사 결과 자진 월북 주장은 허위·날조임이 밝혀졌다’고 북한을 몰아세웠다.
한국 정부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납치 행위가 명백한 도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대상이 전방 부대 대대장이라는 점도 고민거리였다. 그 대대장이 파악하고 있는 정보가 북한에 넘어갈 것에 대비해 방어 체계 전반을 손봐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사안에 관한 보도가 신문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보안사의 횡포에 시달리던 유 중령이 부하를 데리고 자진 월북했고,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고자 보안사에서 ‘유 중령 등이 납치됐다’고 허위 보고를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크게 분노했다. 군의 경비행기가 월북하는 사건이 겹치면서 분노는 더욱 커졌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에 보안사의 활동을 점검하고 횡포를 바로잡으라는 특명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에서 이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이었다.
김기춘 팀은 보안사를 매섭게 조사했다. 중앙정보부는 보안 부대에 대한 원성이 군 내부에 자자할 뿐 아니라, 보안사가 민간 정보 수집 명목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기춘에게 얘기를 직접 들었다는 황호택에 따르면,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김기춘에게 보안사 권한 축소 방안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 안은 곧 실행됐다. 핵심은 보안사 요원들이 민간 정보 수집 명목으로 국회, 법원, 정부 기관 등에 드나들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보안사 쪽에선 볼멘소리가 나왔다. 경쟁 상대인 중앙정보부가 굴욕을 강요한 일로 받아들였다. 특히 김기춘에 대해서는 ‘가슴에 사무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움켜쥐었을 때 김기춘이 위기를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보안사는 1979년 3월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민간 정보 수집 활동을 재개했다. 세간에서 ‘박정희의 양자’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독재자의 총애를 받던 정치 군인이자 하나회를 이끌던 전두환다운 모습이었다. 유신 독재 붕괴 후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보안사의 민간 정보 수집 활동은 중요한 기반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본질은정보기관 간 영역 다툼… 국민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김기춘이 국민을 위해 명실공히 올바른 일을 하다가 보안사의 원한을 샀다고 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게 보기 어렵다.
보안사의 횡포가 심했고, 민간 정보 수집을 명목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 건 사실이다. 이것을 바로잡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잘못을 반성하지는 않고 ‘중앙정보부에 당했다’며 많은 보안사 관계자들이 비뚤어진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건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보안사 쪽의 비뚤어진 피해 의식이 문제인 것과 별개로, 중앙정보부의 조치에 보안사가 자신들에게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 기관은 독재자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였지만(박정희가 이를 조장하기도 했다),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중앙정보부가 우위에 있었다. 정보 기관들의 업무를 통제·감독할 권한을 갖고 있던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의 예산과 수사 범위를 조정할 수 있었다. 정치 공작 측면에서도 보안사는 중앙정보부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중앙정보부는 정권 안보를 위한 정치 공작에 특화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5·16쿠데타(1961년) 직후 탄생한 순간부터 유신 독재가 무너질 때까지 중앙정보부는 늘 그랬다.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쏜 10·26사건으로 한동안 보안사에 눌려 지냈으나, 전두환·신군부 집권 후 오래지 않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가 정권의 중핵으로 다시 자리 잡은 것도 정치 공작 역량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특히 댓글 공작을 비롯한 2012년 대선 개입 등 이명박·박근혜 집권기의 여러 사안을 통해, 국정원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체질은 바뀌지 않았음을 국민들은 ‘아프게’ 확인해야 했다.
1970년대로 돌아가면, 김기춘이 만들었다는 보안사 권한 축소 방안을 둘러싼 갈등의 본질은 정보 기관 간 영역 다툼이었다. 국민을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보안사 권한을 축소했다고 해서 정보 기관 전체의 국민 사찰, 통제, 감시가 줄어들거나 정치 공작이 사라진 게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간 정보 수집을 빙자한 군 정보 기관의 불법 사찰, 정치 개입 문제는 6월항쟁(1987년) 이후에도 계속 터져 나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 보안사 이병 윤석양의 양심선언을 통해 드러난 광범위한 사찰 실태다. 윤석양은 보안사가 정계, 노동계, 종교계, 학계 등 각계 인사 1300여 명을 무더기로 사찰해왔음을 폭로했다.
윤석양의 양심선언 후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러나 사이버사령부의 2012년 대선 불법 개입 등에서도 드러났듯이, 바뀐 건 이름일 뿐 군의 정치 개입 체질은 바뀌지 않았다. 폐지됐던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대면 보고를 부활한 이명박 정권 시절, 기무사 소속 현역 대위가 쌍용차 관련 집회 장면을 몰래 촬영한 사실이 드러난 것도 그러한 사례 중 하나다. 그 대위의 수첩에는 군과는 무관한 민간인 감시 기록이 적잖게 담겨 있었다.
이러한 역사는 정보 기관에 대한 민주적 통제 체계 확립이 오늘날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를 말해준다. 분명한 것은, 정보 기관들의 체질을 뿌리부터 뜯어고치는 것을 주저하면 그 과제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래지 않아 다시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는 점이다.
청와대로 옮긴 지 8개월 만에 10·26… 1차 전성시대 종말
1979년 2월, 김기춘은 4년 5개월에 걸친 중앙정보부 생활을 마무리하고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이동에서도 신직수가 역할을 했다. 그해 1월 청와대 법률 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신직수가 김기춘을 다시 자기 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분명히 보여준 것처럼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정권일수록 국가의 공식 통치 체계를 무시하고 공익을 주저 없이 짓밟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정권에서는 최고 권력자와 사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최고 권력자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가, 권력에 집착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최고 권력자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가 같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박정희의 비호 아래 경호실장 차지철이 전횡한 유신 독재 말기도 그런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시기에 청와대 비서관으로서 박정희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게 된 것은 김기춘에게 또 한 번의 초고속 출세를 위한 발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유신 헌법 제작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하고, 8·15 저격 사건(1974년) 후 문세광 신문을 통해 이미 깊은 인상을 심어준 김기춘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문세광 신문은 박정희만이 아니라, 박근혜를 비롯한 박정희 일가 전체에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한홍구 교수는 김기춘이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박근혜와 접촉할 기회도 자주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극심한 혼돈으로 치닫던 유신 독재는 1979년 10·26사건으로 무너졌다. 김기춘이 청와대로 옮긴 지 8개월 만이었다. 5·16쿠데타를 통해 총으로 시작한 박정희 권력은 18년 만에 심복의 총으로 처참하게 막을 내렸다. 총성이 울린 궁정동 밀실은 7년 전 은밀하게 유신 쿠데타 작업이 진행됐던 바로 그곳이다. 김기춘에게 초고속 출셋길을 열어준 1974년 국립극장 총성과 달리, 궁정동 총성은 김기춘의 1차 전성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10·26 동기, 박근혜·최태민 문제
유신 독재 후반 권력 내부를 혼돈에 빠지게 만든 사안 중 하나가 박근혜·최태민 문제다. 김재규가 항소 이유 보충서에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것”으로 명시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이 문제는 유신 독재 붕괴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 수밖에 없게 만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기원이기도 하다.
박근혜의 인생은 두 남성과 맺은 관계를 제외하면 설명하기 어렵다. 한 사람은 맹목에 가까운 숭배 대상인 아버지 박정희다. 1989년 4월 월간조선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박근혜는 “구약의 모세”에 비유하며 아버지를 치켜세웠다. 박정희 집권기에 숱하게 자행된 고문, 간첩 조작 등으로 인해 삶이 망가지고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거나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정희에 대한 (비판) 기사들을 읽는 동안 자신이 “고문 받는 느낌”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박근혜는 “아버님은 인명을 가볍게 보는 분이 아니었다”며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1979년) 등을 “아버님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례로 제시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박근혜는 “분명히 밝혀둘 게 있다”며 “아버님은 북괴가 김 씨를 납치해놓고 우리 소행으로 덮어씌우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고 얘기했다. 김형욱 납치·살해 사건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북한이 김형욱을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중앙정보부가 자행한 김대중 납치도, 김형욱 납치·살해도 북한 소행인 것 같다고 박정희가 딸에게 말했다는 점도, 진실과는 거리가 먼 그런 얘기를 딸이 ‘아버님을 바로 알리겠다’며 기자에게 전한 점도 눈길을 끈다. 박근혜에게 박정희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산이 부모의 후광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 숭배는 박근혜의 핵심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박근혜가 그러한 박정희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한 대표적인 사안이 최태민 문제다. 박근혜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남성이 최태민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신 체제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이 밀착한 시기는 김기춘이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청와대 법률비서관이었던 시기와 겹친다. 1974년 8·15 저격 사건은 박근혜, 김기춘뿐 아니라 별 볼 일 없던 최태민의 인생도 바꿨다. 청와대에 편지를 보내 박근혜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면서, ‘큰영애’를 앞세워 재물을 긁어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최태민은 박근혜를 등에 업고 각종 이권 개입, 금품 징수, 횡령, 사기 등 비리를 저질렀다.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최태민이 정부, 공기업, 정치권, 군, 재벌 등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고 여성 추문도 끊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너무 심하게 뜯으니 반발이 안 생길 수 없었다.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진정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근혜 관련 사안인지라 손대기가 쉽지 않았지만, 계속 방치할 수도 없었다. 민정수석 박승규가 총대를 멨다. 최태민의 비리를 조사해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박정희는 그전에도 몇 차례 구두 보고를 받아 이 문제를 모르지 않았지만, 상세한 서면 보고를 접하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고 한다. 그러나 딸에게 직접 얘기하는 대신 보고서를 돌려주며,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박근혜에게 말해보라고 했다. 지시를 따른 박승규는 박근혜와 서먹서먹한 사이가 됐다.
이번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나섰다. 박근혜 눈치를 보며 이 문제를 모른 척한 차지철과 달리, 김재규는 백광현 안전국장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 결과 최태민 관련 의혹들이 사실임을 확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를 취했다. 1977년 박정희는 김재규와 백광현을 한쪽에, 박근혜와 최태민을 다른 한쪽에 앉혀놓고 일종의 대질 신문을 했다.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수모였다.
박정희 특명으로 검찰도 이 문제를 조사했다. 결과는 중앙정보부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박정희의 뜻을 거스르고 최태민과 계속 밀착했다. 그러면서 김재규를 공격했다. 10·26 이틀 전에는 박정희에게 “우선 정보부장을 갈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국정 농단 주역인 차지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최태민 문제를 파헤친 김재규를 자르라고 건의한 것이다.
10·26 후 최태민이 전두환·신군부에 구금돼 조사를 받자, 박근혜는 전두환에게 “최 씨에 대한 비난과 혐의는 모두 근거 없는 모함이니 속히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10·26의 충격이 여전했을 때이고, 전두환과는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 문제를 직접 챙겼다.
박근혜·최태민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87년과 1990년 육영재단에서 ‘최태민의 전횡을 반대한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육영재단 이외에 박근혜가 관여한 영남대, 정수장학회에서도 최태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의 활동이 세간의 입길에 오르내렸다. 그러면서 1990년에는 박근혜의 두 동생이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를 구해달라’는 탄원서를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는 일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최태민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계속 머물렀다. 수십 년간 한국 사회를 좀먹은 이 문제는 끝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터져 나오게 된다.
덧붙이면, 10·26 직후 박정희의 비자금 일부를 빼돌리는 데에도 최태민 쪽에서 깊이 관여했다. 청와대에 있던 비자금 금고 두 개 중 하나는 전두환 측과 청와대 관계자가 함께 열어서, 6억은 박근혜에게 주고 나머지는 전두환 쪽에서 가져갔다. 비자금 장부는 박근혜의 동의 아래 태웠다고 한다. 이 6억은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 김성주가 “소년·소녀 가장이 받은 하나의 아파트”라며 박근혜를 비호했다가 빈축을 샀던 바로 그 돈이다.
또 다른 금고의 경우 열쇠가 박근혜에게 전달돼 박근혜가 내용물을 챙긴 것으로 보도됐지만, 오랫동안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와 관련, 조순제(최태민의 의붓아들로 그 밑에서 일했으나 환멸을 느끼고 박근혜·최태민에 대한 녹취록을 남겼다)가 중요한 증언을 했다.
조순제는 10·26 이후 자신이 한 가장 중요한 일이 박정희가 남긴 돈을 최태민 일가 쪽으로 옮기는 데 관여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근혜 각본, 최태민 연출”의 이 일이 마무리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맙다는 인사를 박근혜로부터 들었다”고 조순제는 증언했다.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가 이미 ‘경제 공동체’였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김기춘과 최태민 일가의 관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증언들
김기춘은 박근혜·최태민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까? 김기춘 회고록에는 최태민도, 최순실도 등장하지 않는다. 박근혜에게 치명적인 사안이기에 최태민과 관련된 건 아예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집권기에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권을 탄압한 사실이 이 회고록에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2016년 11월, 김기춘이 약 30년 전부터 최태민 일가와 알고 지냈다는 육영재단 관계자들의 증언이 나왔다. 한 관계자는 1987년 육영재단(당시 이사장은 박근혜) 분규 때 김기춘이 최태민 측을 만나기 위해 재단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말했다. 김기춘이 “육영재단에 찾아와 구사대를 만나 사태 수습 방안을 논의했고, 그 시절부터 최태민 일가를 돌봐줬다는 건 당시 육영재단 직원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김기춘이 당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왔다”고 말했다.
1987년 육영재단 분규는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전횡에서 비롯됐다. 그때 법무연수원장이었던 김기춘은 육영재단을 방문한 사실이 절대로 없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최태민이라는 사람은 소문만 들었을 뿐 직접 접촉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기춘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까맣게 몰랐다고 주장했다. ‘김기춘 소개로 최순실을 만났다’는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의 진술이 나오자, 김기춘은 “(최순실을) 모르는데 어떻게 소개를 하느냐”고 반박했다. “최태민을 접촉한 적이 오늘날까지는 없고 최태민 가족도 접촉한 일이 한 번도 없다”, “최순실이라는 사람하고 연락하거나 접촉한 일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청문회(2016년 12월)에서도 김기춘은 “최(순실) 씨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비서실장이던 2014년 공개된 정윤회 문건에 최순실이 최태민의 딸이라고 나오는데도, “(박근혜가) 최태민 씨 딸과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도 했다. 계속 잡아떼던 김기춘은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자 “최순실이란 이름은 이제 보니 못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고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정말 최순실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날 김기춘은 유신 독재 시기에 “(중앙정보부) 6국인가에서 최태민 씨를 조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얘기도 했다.
얼마 후, 김기춘에게 일침을 가하는 박헌영 K스포츠재단 과장의 증언이 나왔다. 박헌영은 최순실이 김기춘을 “늙은 너구리”라고 불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김기춘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필요할 때에는 김기춘을 이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실장은 최 씨의 존재에 대해 나름 눈치를 챘고, 최 씨가 시키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들어줬다고 보는 게 맞다”며 김기춘이 최순실을 ‘건드려선 안 되는 인물’로 여겼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박정희 일가와 ‘운명적 인연‘, 최태민 일가에 대해선 깜깜?
이 문제에서 김기춘의 마지노선은 최순실의 경우 “몰랐다”, 최태민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듭된 잡아떼기, 박근혜 정권에서 김기춘이 차지한 비중 등을 고려하면 김기춘의 주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유신 독재 붕괴와 박근혜 집권 사이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육영재단 분규가 또다시 터지고 박근혜의 동생들이 ‘최태민으로부터 박근혜를 구해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보낸 1990년에 김기춘은 검찰총장으로 정권의 중핵에 있었다. 최태민 일가 관련 문제에 깜깜할 수 없는 위치였다는 말이다.
김기춘이 박정희 일가와 맺은 인연의 깊이를 생각해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운명적인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고 회고록에 쓸 만큼 김기춘은 박정희 부녀와 수십 년에 걸쳐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런 김기춘이 유신 독재 시기는 물론 10·26 후에도 박근혜 곁에 계속 붙어 있었던 최태민 일가에 관한 것만은 알지 못하거나 그저 소문을 듣는 정도였을까? 육영재단 관계자들 및 박헌영 등의 증언은 가벼이 여길 사항이 결코 아니다.
“6국인가에서 최태민 씨를 조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 부분도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유신 독재 시기에 김기춘이 박근혜·최태민 문제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그 정도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물론 최태민을 조사한 건 김기춘의 대공수사국이 아니었다. 최태민을 조사한 안전국장 백광현이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검사 출신이긴 하지만, 다른 부서에서 진행되는 업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게 하는 ‘차단의 원칙’이 정보 기관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정보 기관의 역사를 살펴보면, 차단의 원칙이 언제나 예외 없이 적용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박근혜·최태민 문제는 유신 독재가 무너질 때까지 4년 넘게 계속되며 권력층을 고민에 빠지게 만든 사안이다. 정권 수호의 근간임을 자부했을 중앙정보부 간부가 그런 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중앙정보부 국장은 수많은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자리다. 대공수사국장이었으니 그 분야 이외의 정보에는 깜깜 어두웠을 것이라고 보는 건 무리다.
청와대 법률비서관 시기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들의 증언이 담긴 자료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는 박근혜·최태민 문제 때문에 “김정렴·김계원 비서실장을 비롯, 거의 모든 수석비서관·특보들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고민”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내에서 총대를 멨던 박승규 민정수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김정렴 실장 때만이 아니라, 김기춘이 근무한 김계원 실장 시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최(태민) 씨 문제가 비서관 회의 테이블에까지 올려질 정도였다”는 어느 수석비서관의 회고다. 그 시기가 김기춘이 법률비서관일 때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실장이 김정렴일 때나 김계원일 때나 청와대 비서실은 이 문제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김기춘 비서관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김기춘은 “6국인가에서 최태민 씨를 조사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항을 유신 독재 시기에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파악 대상에는 최태민만이 아니라, 당시 주목도에서 최태민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 시절부터 박근혜와 함께한 최순실도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더 생각할 문제가 있다. 유신 독재 시기에 박근혜·최태민 문제를 지켜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박정희도 못 떼어낸 최태민을 누가 떼어낼 수 있겠나. 김재규처럼 바른 말 했다가 박근혜 눈 밖에 나느니 차지철처럼 모른 척하면서 필요할 때마다 거래하는 게 상책이다.’
김기춘과 최순실의 관계에 대한 박헌영의 증언(“김 전 실장은 최 씨의 존재에 대해 나름 눈치를 챘고, 최 씨가 시키는 일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들어줬다고 보는 게 맞다”)과 연결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이처럼 김기춘과 최태민 일가의 관계 문제를 되짚어보면 김기춘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알아내야 할 것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