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을 잡기 위해 검사가 됐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괴물이구나싶었다.”

20 가까이 검찰에 몸담은 검사 임은정은 2017 9 <한겨레> 실린 인터뷰에서 검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상당수 검사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다수의 국민들은 말에 공감할 것이다.검찰 공화국 시급한 개혁 대상으로 꼽히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어찌하다가 검찰은괴물 불리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것은 1987 6월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 이후 검찰의 선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없다. 그러한 선택을 통해검찰 공화국괴물검찰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사람이 바로 김기춘이다.

최초의 임기제 검찰총장, 그러나 도입 취지와는 정반대 행보

1988 12 5, 49세의 김기춘은 초임 검사 시절부터 꿈꿔온 검찰총장으로 임명됐다. 그토록 원했던 검찰총장 자리에 김기춘이 오르는 데에는 ‘6 황태자박철언의 힘도 작용했다. 박철언은 인사에서 대통령에게 검찰총장 후보로 김기춘 3명을 추천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박철언으로서는 1981 4·24 인사와 1982 이철희·장영자 사건 검찰에서 쫓겨날 뻔했던 김기춘을 거듭 구해준 이어 김기춘이 검찰 총수가 되는 데에도 도움을 셈이다.

김기춘은 최초의 임기제 총장, 2 임기가 처음으로 보장된 검찰총장이었다. 야당, 재야 법조계 등에서 검찰총장 임기제를 주장한 이유는 분명했다. 검찰총장 임기를 보장해, 그간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해온 검찰이 이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에는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대세가 민주화(부분적·제한적이긴 했지만) 흐름 속에서 검찰도 오욕의 역사를 씻고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도입 현실은 전혀 달랐다.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 취지를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요인 하나는 임기제 도입을 앞두고 변협 등이 제시한검찰총장을 임명할 국회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의견이 묵살된 것이었다. 결과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뜻을 충실히 받들 사람을 골라 검찰총장에 앉히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재판 출석을 위해 서울고등법원에 도착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연합뉴스

최초의 임기제 검찰총장이 김기춘이라는 점도 제도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유신 독재 수호에 적극 나선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김기춘은 검찰총장 임기제 도입 취지와는 상반되는 길을 걸어왔다.

노태우 정권이 김기춘을 검찰총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경력과 떼어놓고 생각할 없다. 국민의 뜻을 받드는 검찰로 거듭나기 위해 분투하는 대신 정권을 지키는 앞장설 사람을 원했다는 얘기다. 김기춘은 청와대의 기대에 부응했다. 과정에서 검찰총장 임기제는 취지와 전혀 달리, 야당과 시민 사회에서 검찰의 무리한 행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올 김기춘 총장을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악용됐다.

번째 시험대, 5 비리 문제

검찰총장 취임 직면한 번째 시험대는 5 비리 처리 문제였다. 전두환 일가를 중심으로 5 실세들의 천문학적인 비리 실태가 드러나면서, 5 청산이 광주 학살(1980) 진상 규명과 더불어 정국의 핵심 사안으로 떠오른 상태였다.

노태우 정권은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5공과 뿌리가 같기 때문에 광주 학살 진상 규명, 5 청산 작업이 철저하게 진행될 경우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있었기 때문이다. 5 측의 거센 반발도 고려하지 않을 없었다.

그렇다고 5 청산 요구 등을 묵살할 수도 없었다. 국민들의 관심이 워낙 뜨거웠기 때문이다. 1988 4 총선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된 것도 노태우 정권에 상당한 부담이었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퇴임 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 전두환 쪽을 견제하는 5 청산 문제를 활용할 있다는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이 검찰에 넘어왔다. 1988 12 13, 검찰은 총장 직속 ‘5 비리 특별수사부’(특별수사부)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했다. 1989 1 31, 특별수사부는 전두환의 형제인 전기환·전경환과 처남 이창석, 안기부장 장세동, 청와대 민정수석 이학봉 47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1981 김기춘의 충성 맹세 편지를 받았다고 박철언이 증언한 허화평은 이때 구속되지 않았다. 발표를 끝으로 특별수사부는 해체됐다.

처음부터 전두환과 정치 자금 제외, 변죽만 울린 5 비리 수사

47명을 구속하긴 했지만, 검찰 수사는 5 비리의 핵심을 파헤치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다는 질타를 받았다. 이는 특별수사부를 설치할 검찰이 보인 모습에서 예견할 있던 결과였다. 검찰은 국회 5 특위에서 제기한 44 19건만 수사 대상으로 정했다. 그리고 특별수사부를 설치한 검찰총장 김기춘은 대통령 노태우가 밝힌전두환에 대한 정치적 사면방침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전두환에 대한 수사는 한다는 얘기였다. 또한 검찰은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노태우의 뜻에 따라 수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핵심 중의 핵심인 전두환 정치 자금 문제를 제외한 것은 청와대의 뜻을 받드는 수사를 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실질적으로 제외한 것은 가지만이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다. 수사해야 사안에 대해서도 검찰은전두환 정치 자금 관련이라는 명목으로 수사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발표된 수사 결과도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일해재단 기금 조성에 관여한 정주영 등이 기금 조성 과정에서일부 강제성이 있었다 국회 청문회에서 시인했는데도, 검찰은 일해재단 등의 기금 조성 과정에서 강제성이 인정되지 않고 기금 유용 사실도 없다고 발표했다.

김기춘은 수사에서정부·여당의 지침이나 영향력을 받지 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태우의 뜻을 받들어 전두환 정치 자금에 대해서는 수사에 착수하지도 않은 자체가 청와대와 검찰의 관계를 분명히 말해준다. 수사 과정에서 김기춘 검찰총장이 청와대와 보고 채널을 유지했고, 이로 인해 따돌림을 당한 허형구 법무부 장관이 노발대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1990 3 3, 검찰은 국회 5 특위가 고발한금융계 황제이원조에 대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5 비리에 대한 노태우 정권 시기의 사법 처리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5 비리로 기소된 사람들 1990 3 이때 복역 중인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집행 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거나, 실형이 선고된 보석으로 풀려나거나, 구속 집행 정지됐다. 사법부는권력형 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한 아니냐 비판을 받았다.

이러했기 때문에 5 비리 수사는결과적으로 비리 주역들에게 면죄부 쥐어주고 6 정권의 가장 고민스러운 과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지적을 피할 없었다. 신문은 김기춘이 “6 정권의 짐이었던 5 비리 사건을 법적으로 말끔히설거지’”했다고 평가했다.

공안 정국 조성과 극우 반공 세력의 대대적인 반격

5 비리 수사를 틀에서 일단락 지으며 청와대의 고민을 덜어준 김기춘은 얼마 노태우 정권에 선물 안겨준다. 유신 독재 시절 4년여 동안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하며 갈고닦은실력 마음껏 발휘하며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계기는 1989 3 황석영과 문익환 목사의 연이은 방북이었다.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밀리고 있다고 여기던 극우 반공 세력은 이를 계기로 대대적인 반격에 돌입했다. 선두에서 김기춘의 검찰이 빠르게 움직였다. 4 3 검찰은 안기부, 경찰, 보안사 등과 함께 공안합동수사본부(공안합수부) 설치했다. 이재오(이때는 재야인사였다), 고은, 리영희 등이 잡혀 들어갔고 재야 단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관계자들도 줄줄이 구속됐다.

그런 속에서 방북이 이어졌다. 6월에는 문규현 신부에 이어 임수경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대표로 북한을 방문했다. 같은 , 평화민주당(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서경원은 1 북한을 은밀히 방문했던 사실을 밝히고 안기부에 자진 출두했다.

민주화를 일거에 뒤집을 기회를 엿보던 극우 반공 세력에게 연이은 방북은 좋은 소재였다. 노태우 정권은 이를 계기로파출소에 M16 실탄 지급’, ‘정당, 교회, 학원을 막론하고 불법 시위에 공권력 투입 초강경 조치를 발표했다. 방북한 문익환 등은 바로 구속됐다. 공안합수부의 표적은 방북 관련 인사만이 아니었다. 공안합수부는 사회 부문에서 극우 반공 세력이 강제한 것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던 이들을 광범위하게 잡아들였다. 좌경 용공 폭력 세력 척결이라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좌경 용공 폭력 세력규정은 지극히 자의적이었다.

공안 정국의 광풍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를 가지만 살펴보자. 하나는 공안합수부가 존속 77일간 443명이나 사법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중 317명은 구속됐다. 사법 처리된 사람의 상당수는 노동 운동 관계자 방북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1988년에 비해 공안 정국의 광풍이 거셌던 1989년에 구속 노동자 수가 6~7 넘게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는 시기 공안 통치의 주요 표적이 노동 운동이었음을 말해준다.

공안 바람은 정치권에도 불었다. 문익환의 방북 계획을 사전에 들었고 서경원이 속한 평민당의 총재이던 김대중은 조사를 받고 불구속 기소됐다. 그뿐 아니라 검찰은 김대중이 서경원을 통해 북한 공작금 1 달러를 받았다고 발표하며 김대중을 몰아붙였다. 김대중 1 달러 수수설은 훗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검찰, 김기춘 지휘 아래 정권 수호 선봉장으로

공안 정국 조성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광범위하게 탄압할 있었다. 노태우 정권에 부담이었던 광주 학살 진상 규명, 5 청산 문제 등을 공안 정국으로 어느 정도 가리는 효과도 거뒀다. 공안 정국 조성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5 청산 문제로 분열됐던 여권의 결속도 다졌다. 공안 정국은 여소야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권의 합종연횡 추진 과정에서 김대중의 평민당을 배제하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선 김기춘과 검찰의 정권 위상도 높아졌다. 김기춘은 취약했던 노태우 정권의 버팀목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검찰의 입지를 공고하게 다졌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전에는 안기부, 등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던 검찰이 김기춘 총장 시기를 거치며 정권 수호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됐다는 말이다. 위상이 높아진 검찰은 청와대에 밀착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김기춘은 시기 검찰을 상징하는 인물 여겨지게 된다. 엘리트 의식으로 충만한 적잖은 검사들 눈에는 권력 기관들 사이에서 기를 펴던 이전의 검찰 위상이 못마땅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위상을 높인 김기춘이 그만큼 대단해 보이지 않았을까?

김기춘은미스터 법질서 자칭했다. 남들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랐다. 그와 함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의 선봉장을 자임했다. 그러나 오늘날 뉴라이트 등이 자유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면 자유민주주의자와 한참 거리가 것처럼, 김기춘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역시 실체는 극우 반공주의일 뿐이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김기춘을 다르게 불렀다. 공안 정국을 거치면서 김기춘은 이들에게정권의 파수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최대의 탄압자 불리게 된다.

강력 사건 실적으로공안 집착가리기

검찰의공안 집착 공안합수부 해체 후에도 계속됐다. 그러나 외부에 드러나는 방식은 달랐다. 검찰은 민생 치안을 확립한다는 취지로 1989 10월부터 대검찰청과 전국 지검에 강력부를 설치했다. 이것이 검찰의 공안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예컨대 1990 10 검찰은 폭력배 50명을 지명 수배하는데, 이들이 검거되면 신문에서 대서특필하곤 했다. 이렇게 되면서 언론 보도에서 공안 사건이 강력 사건에 묻히는 일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당시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강력부가 앞장서서 일을 만들어나가는 가운데 공안부는 뒤에서 조용하게 티를 내지 않고도 공안 사범들을 집요하게 야금야금 해치워나갔다고 있다.”

눈여겨볼 다른 사항은 이러한 움직임이 1990 10 13일에 시작된범죄와의 전쟁 맞물렸다는 점이다. 당국은 이를 통해 범죄가 많이 줄었다고 자평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그와 달랐다. 인권 침해 문제도 적잖게 발생했다. ‘범죄와의 전쟁선포 모든 외근 경찰관에게 총기와 실탄을 제공한 결과 경찰의 총기 사용이 크게 늘고, 심지어 폭행으로 고발된 현직 경관이 화해에 응하지 않는 주민 민간인 4명을 사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강력 사건 실적은 검찰의 공안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는 ‘범죄와의 전쟁’과 맞물려 진행됐다. 이미지는 ‘범죄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한 장면. ©쇼박스 팔레트픽처스

또한범죄와의 전쟁 정치적 요소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범죄와의 전쟁선포 노조 간부를 대거 구속·수배하는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 것도 그런 요소 하나다. 검찰이 강력부 실적을 내세워공안 집착이미지를 희석시키려 것도 점과 연결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실범죄와의 전쟁 윤석양이 보안사의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 실태를 폭로한 9 만에 선포되면서민간인 사찰 폭로에 정치적으로 대응한 아니냐 지적을 처음부터 받았다.

김기춘의 공안 신념, ‘무좀론’…“끊임없는 사상 투쟁 필요

김기춘이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선 데에는 정권을 떠받치고 검찰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뜻도 작용했겠지만, 그게 전부라고 수는 없다. 공안 정국 조성은 김기춘의 신념과 부합하는 이기도 했다.

김기춘은 검찰총장 재임 기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하다. 약을 바르면 잠시 들어갔다가, 약을 바르지 않으면 또 재발하는 것이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김기춘은 회고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만큼 끊임없는 사상 투쟁, 국민의 사상 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경향신문>(1990년 1월 5일 자)에 실린 김기춘 검찰총장 인터뷰. 김기춘은 스스로 ‘미스터 법질서’라고 칭했고 남들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기를 바랐다. ©<경향신문> 화면 갈무리

1990 1 <경향신문> 실린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이, 김기춘은 1987 6·29선언 이후 민주화란 미명 아래 좌경 세력이 사회 곳곳에서 머리를 들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김기춘에게 공안 정국 조성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과정에서 사명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념이었다.

좌경 세력이라는 규정은 지극히 자의적이었다. 정권을 강하게 비판하면 언제든 좌경 세력으로 몰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좌경 세력 대신공산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극우 반공주의에 영합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그것을 비판하면 언제든공산주의자들또는 좌경 세력으로 몰릴 있었다.

그처럼 위험한 신념을 김기춘 사람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극우 반공 세력 전반이 공유했다고 있다. 김기춘의 삶을 살펴보면, 검찰총장 시절만이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그러한 모습이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는 것을 있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유신 독재를 지키는 열과 성을 다하고,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의 수사 책임자를 맡은 등도 그런 차원이다. 박근혜 밑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김기춘이 보인 모습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공산주의자들”, “무좀”, “독버섯”, “끊임없는 사상 투쟁”, “국민의 사상 무장등에서 박근혜 정권의세월호 죽이기공작과 블랙리스트 문제를 떠올리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기춘의무좀론 관련해 가지 생각할 사항이 있다. “무좀이라는 비유가 사회주의를 나쁜 병균으로 묘사하면서 비판 세력 전반을 탄압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비롯한 파시스트들의 방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김기춘이 세종대왕과 함께 존경한다고 밝힌 박정희도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김기춘이 자랑한 공업용 쇠기름 수사, 7 9개월 만에 무죄 확정

김기춘의 검찰총장 시절 사건을 가지만 살펴보자. 공업용 쇠기름 파동이 그것이다. 1989 11, 검찰은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쓰이는 공업용 수입 쇠기름으로 라면 등을 만들어 팔았다며 삼양식품 대형 식품 회사 5곳의 대표 10명을 구속했다. 검찰이 수사 결과 발표 공업용 쇠기름이 인체에 유해한지는 규명되지 않았다 했지만, 파문은 엄청났다.

시민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발표 직후 가게에서 라면 판매가 사실상 중단될 정도로 판매량이 급감했다. 동남아에서 라면을 비롯한 한국산 인스턴트식품을 기피하는 현상도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재판이 진행됐다. 1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했지만, 2심에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1997 8,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이 나왔다. 사건 발생 7 9개월 만이었다.

애초에 쇠기름이 공업용으로 분류된 내장과 사골을 먹지 않는 미국인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그것이 검찰 수사 발표를 거쳐사람이 먹을 없는 으로 알려지면서 일대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라면 업계가 전반적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삼양식품이 가장 타격을 입었다. 60퍼센트에 달하던 삼양식품의 시장 점유율은 파동 이전의 4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대법원 판결 삼양식품 회장은검찰 수사로 1,000 명의 직원이 한꺼번에 회사를 떠나는 한때 우리 회사는 공중분해될 뻔했습니다라며그동안 받은 엄청난 피해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합니까라고 하소연했다.

김기춘 총장 시기 검찰의 수사로 시작된 공업용 쇠기름 파동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파동에 휘말린 삼양식품 등은 7년 9개월 만에 무죄확정 판결을 받지만, 이 파동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미지는 삼양식품 홈페이지 역사관에 있는 ‘우지 사건의 모든 것’의 일부. ©삼양식품 홈페이지 갈무리

검찰총장일 김기춘은 사건 수사를 자랑스러워했다. 1990 1 <경향신문> 실린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동국대 입시 부정 사건과 함께 공업용 쇠기름 파동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형 식품 회사 대표들을 잡아들일 많은 국민들이과연 검찰이 큼직한 부정 사건에 손을 대는구나라고 손뼉을 쳤을 것으로 자임합니다.”

사건은 2016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다시 화제가 됐다. 김기춘이 삼양식품 경쟁사이자 파동에 휘말리지 않은 농심의 법률 고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농심은 김기춘과 재계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 역사에서 김기춘 총장 재임 시기가 갖는 의미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2 전성시대의 문을 열었던 김기춘은 1990 12 5 퇴임했다. 퇴임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후배 검사들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학생 시절의 순수성, 정의감이 끝까지 퇴색되지 않았으면 한다.”

적잖은 사람들에게 쓴웃음을 짓게 만들 법한 답변이다.

검찰 역사에서 김기춘 총장 재임 시기가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검찰이 극우 반공 정권의 시녀로 살아온 오욕의 역사를 씻고 거듭날 있는 기회를 검찰 스스로 걷어찬 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회는 검찰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표되는 저항을 통해 국민들이 만들어준 기회였다. 그러나 검찰은 기회의 문을 열고, 민주 사회에 어울리는 검찰로 나아가기 위한 분투를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극우 반공 정권에 밀착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 기관 내에서 위상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극우 반공 정권 수호의 선봉장 자리를 꿰찼고, 검찰의 특권도 강화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민의 뜻을 무겁게 여기고 그것을 받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검찰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기회의 문이 넓지는 않았다. 6월항쟁 민주화가 부분적·제한적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 입맛에 맞는 사람을 검찰총장에 앉히는 구조가 바뀌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검찰이 정치권만 탓할 처지는 결코 된다. 검찰 공화국 구축한 6월항쟁 이후 시기는 더더욱 그렇다.정치 검찰이라는 비난에 억울해하며 정치권 탓을 하는 일부 검찰 간부에 대해 임은정 검사는 이렇게 지적했다.

자신의 행동에 형사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은 14 미만의 형사 미성년자뿐이다. 검사가 형사 미성년자는 아니지 않나?”

오욕의 역사를 씻고 거듭날 있는 기회를 검찰 스스로 걷어차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사람이 김기춘이다. 검찰 공화국 김기춘 검찰총장 시기에 기반이 마련되고,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이던 때에 굳히기 단계에 들어섰다고 있다. 그렇게 재구축된 검찰의 틀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 권력, 자본 권력에 영합하는 검사들이 잘나가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귀결이괴물 불리는 검찰이다.

주권자의 뜻을 외면하는 검찰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가를 오랫동안 국민들은 절감해야 했다. 그러했던 검찰이 촛불 항쟁을 거치면서 전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검찰의 체질이 바뀔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민주 사회에 어울리는 검찰로 거듭났다고 대다수 국민이 수긍할 있는 , 바로 그때가 검찰이 김기춘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있는 때일 것이다.

2018 현재 검찰은 다시 기회의 앞에 있다. 촛불 항쟁을 통해 국민들이 만들어준 기회다. 이번에도 검찰 스스로 쟁취한 기회는 아니다.

이번에는 검찰이 기회를 살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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