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수는 없다’ 위험한 신념과 ‘개밥’
김기춘 법무부 장관 시기를 대표하는 사건은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이지만, 김기춘식 ‘법의 지배’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사안은 그것만이 아니다. 몇 가지 사안을 통해 그 부분을 더 살펴보자.
“법무부 산하 수형 기관에는 현재 일부에서 주장하는 소위 양심수란 존재하지 않으며, 양심수라고 내세우는 사람도 파괴·방화나 국가 존립을 위협한 자들에 불과할 뿐이다.”
1991년 10월 10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김기춘은 이렇게 잘라 말했다.
김기춘의 단언과 달리 양심수는 존재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것은 김기춘 같은 공안 세력의 왕성한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기춘이 수사 책임자를 맡았던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1975년)과 닮은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은 1980년대에도 끊이지 않았다. 노태우 집권기에 김기춘이 앞장서서 조성한 공안 정국을 통해서도 양심수는 양산됐다.
실상이 그러한데도 김기춘은 ‘양심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는 양심수의 존재를 인정하면 극우 반공주의의 존립 기반이 위협을 받는다고 공안 세력이 여긴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반하는 그러한 위험한 신념은 전향 문제에 대한 태도와 이어진다.
강제 전향 공작은 일제 강점기와 유신 독재 시기에 특히 심하게 자행되며 숱한 문제를 일으켰다. 1992년 비전향 장기수들이 사상 전향 제도가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 소원을 처음으로 낸 것도 그 때문이다.
돌아온 것은 보복 조치였다. 김기춘 장관의 법무부는 대전교도소에 모여 있던 비전향 장기수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헌법 소원을 주동한 사람들을 분산 이감시켰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1985년)에 휘말려 옥살이를 하던 강용주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강용주는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후 창문도, 햇빛도 없는 ‘중징벌자 수용 완전 폐쇄 독거실’에 갇혔다. 손을 뒤로 묶은 채 입을 대고 밥을 먹게 하는 ‘개밥’이라는 징벌을 받고, 전향서를 쓰라는 강요도 당했다.
이례적 공소 취소와 김기춘식 “법 집행의 형평”
1991년 10월 10일 국회에서 김기춘은 이런 발언도 했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자들 중 일부를 석방하라는 주장도 법 집행의 형평에 어긋나며 정치적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김기춘은 “법 집행의 형평”을 강조할 처지가 아니었다.
전·현직 국회의원 및 장관에 대한 공소 취소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그해 7월 25일 검찰은 1심 재판에 계류 중인 문동환, 노무현 등 야당 의원 4명과 전 민정당 의원 이상재, 전두환 집권기에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박종문 등 6명에 대한 공소를 취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과거사 재심 사건 등에서 자신들의 잘못이 명백하게 확인돼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왜곡된 형태의) 조직 보위 논리가 강한 기관이다. 검찰의 잘못을 인정하는 취지의 ‘무죄 구형’을 했다는 이유로 해당 검사(임은정)를 중징계한 조직이다.
그런 검찰이 ‘법을 어겼으니 재판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가 ‘없던 일로 해달라’며 스스로 기각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소 취소 결정은 국회 운영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김기춘에게 6명에 대한 관용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다음 날 이뤄졌다. “야당 의원 4명과 5공 인사 2명을 ‘거래’한 것”이라는 언론의 지적대로, 그 배경에는 여야 정치권의 일시적 밀월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기춘의 법무부와 검찰은 정치권의 요구에 순응했다.
공소 취소는 “사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형평을 잃어버린 크게 잘못된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주된 이유는 야당 의원 4명 때문이 아니었다. 문동환 의원은 1989년 문익환 방북 사건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노무현 의원은 현대중공업 파업과 관련해 제3자 개입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공안 정국에 휘말린 점,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이 대표적인 노동 악법 중 하나로 꼽힌 점 등을 고려하면 야당 의원들에 대한 기소는 처음부터 무리한 측면이 있었다. 공소 취소가 주로 문제가 된 건 이상재, 박종문 때문이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이들은 1988년 국정 감사와 5공 청문회 때 위증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그런데 이들을 고발했던 국회가 느닷없이 선처를 요청한 것도, 검찰이 그걸 받아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두 번째, 이들과 마찬가지로 국회의 고발 조치에 따라 불구속 기소된 김만기의 경우 1심 재판이 끝나 유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김만기는 1980년 삼청교육대를 담당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김만기에 대한 유죄 선고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문제가 된 건, 그래도 꼬박꼬박 법정에 출석한 김만기와 달리 이상재와 박종문은 재판에 불출석하며 버텼기 때문이다. 이상재의 경우 온갖 핑계를 대며 10번 넘게 불출석해 재판부에서 강제 구인을 검토할 정도였다. 그런데 검찰의 공소 취소로, 법정에 출석한 김만기는 유죄 선고를 받고 불출석한 이상재 등은 면죄부를 받았다. 공소 취소 직후 법원에서는 “장난하는 건가 뭔가”라는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도됐다.
세 번째는 이상재의 예사롭지 않은 경력 때문이었다. 이상재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일 때 그 휘하의 준위였다. 계급은 높지 않았지만,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찬탈 과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하며 한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특히 1980년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 통폐합 등은 보안사 정보처 언론대책반장 이상재를 빼놓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다.
전두환 퇴임 후 이상재도 국회 청문회의 소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재는 청문회에서 진실을 털어놓기는커녕 위증한 혐의로 고발됐다. 그런 이상재가 검찰의 공소 취소로 구제된 것이다. “법 집행의 형평”을 공언한 김기춘식 ‘법의 지배’의 실상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오대양 사건 재수사…“속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
김기춘이 검찰총장일 때 시작돼 법무부 장관 때에도 정권 차원에서 계속된 ‘범죄와의 전쟁’의 또 다른 면모도 드러났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 후 노동 운동 등에 대한 탄압을 강화한 것과 별개로, 조폭 소탕에 전력을 다한 것과도 거리가 멀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를 확연히 보여준 것이 1992년 2월 불거진 김태촌 비망록 파문이다. 이 비망록은 폭력 조직 서방파 두목 김태촌의 운전사 겸 비서로 일했던 사람이 보고 겪은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각계의 김태촌 비호 세력, 그리고 김태촌이 경찰 간부, 교도관, 안기부 직원, 장교, 정치인 등과 맺은 교분 관계 등이 적혀 있었다.
고위 경찰 간부인 총경이 김태촌에게 수사 정보를 흘려주고 교도관들은 특혜를 베풀었으며, 그 대가로 금품을 받은 사실 등도 기록돼 있었다. 재판부는 이를 김태촌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다.
그런데 정작 검찰은 비망록 관련 사항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수사하지 않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문제가 불거지기 1년 전(1991년), 검찰은 경찰에 비망록 관련 사항을 은밀히 통보하고 파문이 확산되지 않도록 자체적으로 해결하게 했다. 법무부 역시 비망록과 관련된 교도관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선에서 징계를 매듭지어 논란을 빚었다.
오대양 사건(1987년 8월 경기도 용인 오대양(주) 공장에서 32명이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 재수사와 유병언 전 세모 그룹 회장 관련 사항도 법무부 장관 시절 김기춘과 관련해 심심찮게 거론된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구원파에서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 ‘우리가 남이가’라는 현수막을 내걸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것을 통해 김기춘과 뭔가 유착 관계를 맺은 것 같은 분위기만 풍겼을 뿐, 구원파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건 없다.
구원파에서 김기춘을 물고 늘어진 것과 별개로, 당시 상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1991년 7월 오대양 신도였던 6명이 자수한 것을 계기로 재수사가 시작됐다. 그해 8월 1일 김기춘 법무부 장관은 자수 동기, 사채 행방, 집단 변사 사건 배경, 정치 세력 개입 의혹 등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 정치 세력 개입 의혹을 언급한 부분은, 1987년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제기된 전두환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관련된 의혹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검찰은 재수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발표했다. 사기 행각과 세모의 관련성을 밝혀내고 유병언을 사법 처리(상습 사기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 4년형 확정)하는 등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의혹을 해소하지는 못했다. 집단 변사의 사인과 배경 관련 부분은 1987년 경찰 수사에서 별로 나아가지 못했고, 정치 세력 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는 미진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1991년 8월 21일 사설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김기춘 법무장관이 이달 초 국무회의에서 검찰 수사로 밝혀내겠다고 한 4가지 중 어느 하나도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게 없다.”
이렇게 1987년에도, 1991년에도 이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하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맞닥뜨려야 했음을 많은 한국인은 세월호 참사 후 뼈아프게 되짚어야 했다.
사위에게 직접 상을 준 장관 장인
김기춘은 1991년 상청회(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 모임) 회장에 취임했다. 또한 장관으로서 만만찮은 일정을 소화해야 했을 이 시기에도 박정희 관련 행사를 챙겼다. 1991년 10월 26일에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 12주기 추도식’에 현직 장관으로서 모습을 드러내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박근혜 등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는 박정희 집권기를 덮어놓고 찬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노태우 정권을 겨냥한 내용의 추도사도 낭독됐다. <동아일보>는 이날 행사에 대해 “과거의 잘못은 덮고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그때가 좋았다’는 역논리를 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고 지적했다.
장관 시절 김기춘은 사위에게 직접 상을 주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법연수원 수료자 중 2등이 법무부 장관상을 받는데, 1992년 2월 수상자가 김기춘의 큰사위 김도영(사시 31회)이었던 것. 장관 장인이 예비 법조인 사위에게 상을 준 이 일은 법조계의 화제였다. 김기춘으로서는 더없이 흐뭇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김도영은 법원장을 지낸 판사의 아들이자 김기춘의 까마득한 서울대 법대 후배다. 김기춘은 대학 시절을 회고하는 글에 “바둑 맞수”이자 “정다운 친구”인 큰사위에게 “인생 경험에서 얻은 생각들을 (중략) 들려주곤 한다”고 썼다.
김도영은 판사를 거쳐 2018년 현재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기업 인수·합병과 구조 조정 전문가로 통하며, 2014년 “김앤장의 허리를 맡은 주축 3인방” 중 한 사람으로 언론에 소개됐다. 2011년 론스타 측 한국 대리인이 김앤장의 김도영 변호사였다.
김기춘은 1남 2녀를 두었다. 작은사위인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에서 일했다. 외아들은 의사가 됐으나, 현재 의식 불명 상태로 김기춘 등이 성년 후견인으로 지정돼 있다.
안기부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 사실상 면죄부 준 검찰·법원
법무부 장관 시절 김기춘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선거법 집행이었다. 김기춘이 장관일 때 큰 규모의 선거는 두 번 치러졌다. 광역 의회 의원 선거(1991년 6월)와 14대 총선(1992년 3월)이 그것이다. 장관 취임 직후 치러진 전자보다는 선거의 시작부터 끝까지 법 집행을 주관한 후자를 통해 김기춘과 선거법 문제를 살펴보자.
14대 총선을 앞두고 김기춘은 공명선거를 강조하면서 선거 관련 금품 수수, 선거 비용 과다 지출, 흑색선전, 공무원의 선거 관여 등을 집중 단속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선거가 끝난 후 검찰은 선거 사범 1,044명을 입건하고 그중 427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1988년 13대 총선과 비교하면, 입건 규모는 비슷한데 기소율이 두 배에 가까웠다.
기소율만 보면 선거법이 엄정하게 집행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실상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각종 불법 선거 운동이 난무한 가운데 그 진상이 검찰 수사를 통해 철저히 규명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를 잘 보여준 사안 중 하나가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이다. 투표일을 사흘 앞둔 1992년 3월 21일, 안기부 대공수사국 요원 4명이 서울 강남을 선거구에서 민주당 후보 홍사덕의 사생활을 비방하는 흑색선전물을 뿌리다가 민주당 선거 운동원들에게 붙잡혔다. 전신인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정치 공작에 특화된 조직인 안기부다운 행태였다.
현행범으로 딱 걸린 안기부 요원들은 구속 기소됐다. 흑색선전물이 작성된 장소는 안기부 사무실이었다. 안기부 상층, 더 나아가 집권 세력 고위층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몇몇 안기부 요원의 개인적 일탈이며 안기부와는 무관하다고 한다면 그걸 누가 납득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배후 문제 등 핵심 의혹은 검찰 수사에서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검찰은 안기부의 선거용 공작금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돈의 흐름(총선 6일 전 개설된 안기부의 가명 계좌에서 3월 19일 10만 원 권 자기앞 수표로 29억 원이 한꺼번에 인출되고, 그중 일부를 21일 잡힌 요원 중 한 명이 갖고 있었다)을 확인하고도 그에 대해 추궁조차 하지 않았다.
재판도 졸속으로 진행됐다. 첫 공판에서 심리는 25분 만에 끝났고, 검찰은 이례적으로 그날 구형까지 했다. 1심 재판부는 안기부 요원 4명이 “음지에서 묵묵히 성실하게 일해온 모범 공무원”이라며 집행 유예를 선고하고 모두 풀어줬다. 사법부 스스로 안기부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검찰은 항소 포기 방침을 밝혔다. 여론은 검찰을 거세게 질타했다. 검찰은 하루 만에 방침을 번복하고, 마지못해 항소했다. 항소심에서도 집행 유예가 선고됐다. 검찰은 상고를 포기했다. 그렇게 법적 처리가 마무리되고 핵심 의혹은 묻혔다.
사건 당시 대공수사국장은 김기춘의 고교·대학교·검찰·중앙정보부(안기부) 후배인 정형근이었다(김기춘 역시 대공수사국장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대공수사국 요원들이 흑색선전물을 살포하다가 잡혔는데도 정형근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 후 김영삼 정권 때 안기부 1차장으로 승진하고, 1996년 국회의원이 된 다음에는 안기부 수사권을 확대하는 내용의 안기부법 ‘개악’을 주도하게 된다. 사건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공안 1부 김경한 부장 검사는 그 후 5대 로펌 중 하나인 세종 대표 변호사를 거쳐 이명박 정권의 초대 법무부 장관이 된다.
한맥회 사건에서도 검찰은 “선거 부정 덮는 데 급급”
한맥회 사건도 14대 총선에서 불거진 대표적인 불법 선거 운동 사건 중 하나다. 여당인 민자당의 외곽 조직인 한맥청년회(한맥회)가 일당을 주고 불법으로 수많은 대학생을 선거 운동에 동원한 사건이다.
이 사건 역시 배후에 집권 세력 고위층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서도, 재판 과정에서도 그 부분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그 점에서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과 판박이였다.
검찰 수사 및 재판 양상도 비슷했다. 수사 과정에서 검찰은 “선거 부정 덮는 데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도 졸속으로 진행됐다. 검찰은 첫 공판에서 단 5분 만에 신문을 마치고 구형까지 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안기부 요원 4명을 “모범 공무원”으로 치켜세우며 1심에서 풀어준 법원이 한맥회 사건 1심에서는 한맥회장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는 것이다. ‘한맥회장 실형 선고는 안기부 사건 선고 후 쏟아진 여론의 비난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검찰 쪽에서 나올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판결이었다.
의문을 자아낸 그 차이는 곧 해소됐다. 1심 선고 두 달 후 법원은 보석을 허가하며 한맥회장을 풀어줬다. 다시 석 달 후에는 항소심에서 한맥회장에게 집행 유예를 선고했다.
14대 총선 당시 군 부재자 투표 과정에서 자행된 선거 부정 문제도 불거졌다. 현역 육군 중위 이지문이 실상을 폭로했고 이원섭 일병은 대리 투표 실태 등을 언론에 제보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군 부재자 투표 부정의 전모를 밝힐 의지가 없었다. 군부는 이지문, 이원섭에게 보복했다. 이지문은 이등병으로 강등돼 파면을 당했고 이원섭은 구속됐다.
안기부장 김기춘? 그렇게 될 뻔했다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 등을 처리하는 과정은 김기춘의 공명선거 공언이 빈말이었음을 보여줬다. 이는 김기춘의 법무부와 검찰이 선거 부정의 전모를 파헤칠 경우 노태우 정권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여권의 정권 재창출 목표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은 김기춘의 향후 입지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김기춘은 고향·고교 선배이자 유력한 대권 후보인 김영삼 쪽과 이미 밀착한 상태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더 힘 있는 자리, 즉 안기부장을 맡을 것이라는 관측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었다.
장관 시절 김기춘은 여러 차례 안기부장 물망에 오르는데, 그 배경에는 김영삼과 맺은 특별한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14대 총선 직후 김기춘은 안기부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다.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으로 안기부장 서동권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김기춘이 그 후임으로 검토됐다. 김영삼이 서동권 후임으로 김기춘을 기용할 것을 강력히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1992년 3월 노태우는 ‘김영삼 사람’이 아닌 내무부 장관 이상연을 후임 안기부장으로 택했다. 노태우의 주요 기반인 TK(대구·경북) 세력 쪽에서 ‘김영삼 사람’인 김기춘에 대해 적잖은 거부감을 보인 것이 한 원인으로 지적됐다. 노태우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은 때임을 고려하면, 이 인사로 김기춘이 노태우 집권기에 안기부장을 맡을 가능성은 사라지는 듯했다.
반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이 급변했다. 계기는 14대 총선 당시 충남 연기군수였던 한준수의 양심선언이었다. 8월 31일 한준수는 노태우 정권이 이 총선에서 광범위한 부정을 자행했다고 밝혔다. 민자당 후보 임재길의 승리를 위해 돈을 뿌린 내역, “여당 후보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이상연 내무부 장관이 독려 전화를 한 사실 등을 구체적으로 폭로했다.
파장은 컸다. 연기군에 한정된 사례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상연이 현직 안기부장이라는 점, 임재길이 노태우의 육사 후배이자 총선 직전까지 청와대 총무수석이었던 점 등도 작용했다.
안기부장 교체를 포함한 개각이 불가피해 보였다. 다시 김기춘이 후임 안기부장으로 여기저기서, 그것도 3월 교체 때보다 훨씬 유력하게 거론됐다. 김기춘이 “안기부장에 임명될 것으로 전해졌다”(동아일보), “안기부장 임명이 유력”(한겨레)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후임 “0순위”(경향신문)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김기춘으로서는 기대에 부풀어도 좋을 법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9월 18일 노태우가 대선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한 ‘중립 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중립 내각’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는 것은 김기춘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10월 9일 노태우는 일부 개각을 단행하고, 자신의 경호실장 출신인 이현우를 신임 안기부장에 임명했다. 이날 김기춘은 1년 5개월 만에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났다.
장관 퇴임 후 정치 공작에 나선 맥락
안기부장 문턱에서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김기춘이 안기부장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사라진 건 결코 아니었다. 4년이 넘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경험, 공안 정국을 조성해 정권 보위에 앞장선 경력 등은 안기부장 자리 경쟁에서 김기춘의 강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3당 합당(1990년)으로 탄생한 거대 여당 민자당과 김영삼 후보가 대선에서 우세한 건 사실이었지만, 14대 총선 패배에서도 드러나듯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권이 교체될 경우 김기춘이 안기부장이 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기춘으로서는 안기부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권력 중심부에 계속 있으려면 김영삼이 당선돼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 후에는 논공행상이 있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있는 공, 없는 공 다 내세우며 공치사를 늘어놓는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권력의 생리에 어두울 수 없었던 김기춘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김영삼의 뜻을 받들 안기부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의 관계만으로는 부족하다. 논공행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공적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이 시기 김기춘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대선을 두 달 앞두고 퇴임한 김기춘은 은밀히 일을 꾸몄다. 경력을 최대한 살려 정치 공작을 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민주주의를 짓밟는 김기춘의 공작은 온 세상에 공개된다. 스스로 초래한 53년 인생 최대의 위기는 복국과 함께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