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헌 심판 제청 신청으로 뒤집기 시도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 김기춘은 1992년 12월 29일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는 것이 마땅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김기춘은 잘못을 인정하고 뼈를 깎는 반성을 하기는커녕 뒤집기를 시도했다.
김영삼 정권 출범 다음 달인 1993년 3월 17일, 김기춘은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재판부에 냈다. 자신에게 적용된 대통령 선거법 36조 1항(선거 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 운동 금지)이 헌법에 규정된 죄형 법정주의에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숙련된 법 기술자다운 교묘한 행동이었다. 문제의 36조 1항은 이전부터 ‘표현의 자유, 참정권 등을 제한해 위헌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김기춘은 바로 그 틈새를 파고들어 초원복집 사건에 대한 처벌을 면하려 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봤다. 위헌 결정이 나올 가능성에 더해, 국회에서 해당 법 조항을 헌법재판소 결정 전에 개정할 수도 있다는 점까지 김기춘이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는 지적도 나왔다.
<동아일보>는 “법무장관 재직 당시 유난히 선거 관련법의 엄정한 집행을 강조했던 김 전 장관이 막상 이 법률이 자신에게 올가미로 다가오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며 “아전인수 법리”라고 비판했다. (법무부 장관 시절 김기춘이 엄정한 선거법 집행을 강조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안기부 요원들의 흑색선전물 살포 사건, 한맥회 사건,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관권 부정 선거 실태 폭로 등에서 드러나듯이 실상은 엄정한 집행과 거리가 멀었다.)
김기춘이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검찰이 위헌 소지가 크다는 지적을 받는 법 조항을 김기춘에게 적용한 덕분이었다. 공소 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부터 나온 것도 그와 무관치 않았다.
위헌 심판 제청 신청 후, 이제라도 검찰이 공소 사실을 변경해 김기춘에 대한 처벌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기춘을 기소할 때 적용하지 않은 공무원 선거 개입 교사(초원복집으로 기관장들을 불러 모아 지역감정 조장, 관권 선거, 언론 공작 등을 부추긴 것) 부분 등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검찰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그해 4월 14일 검찰은 공소 사실 변경 없이 김기춘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구형량이 낮은 건 공무원 선거 개입 교사 부분 등에 대해 검찰이 수사 단계에서 이미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선고 공판은 5월 4일로 예정됐다. 그러나 이 선고 공판은 열리지 않았다. 4월 27일, 재판부가 김기춘이 낸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재판은 무기한 연기됐다.
1993년이 다 가도록 헌법재판소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1심 재판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만 흐르는 가운데, 1993년 10월 김기춘의 변호사 등록이 허용됐다. 변호사 100여 명이 “과거 공안 통치의 주역이며 대표적 정치 검사”인 김기춘의 변호사 개업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기춘은 서울지방변호사회에 개업 신고까지 했지만, 반발을 감안해서인지 그해 연말까지 변호사 사무실을 내거나 사건을 수임하지는 않았다.
“법률가들에게 저주 있으라!” 현직 법대 교수의 질타
김기춘에 대한 재판 절차가 정지되고 헌법재판소 결정은 나오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겨레>(1993년 10월 12일 자)에 실린 김성태 경희대 법대 교수의 칼럼(‘강기훈과 김기춘’)도 그중 하나다.
김 교수는 법무부 장관 시절 김기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유서 대필 조작 사건에 휘말린 강기훈과 김기춘의 상황을 비교했다. 강기훈은 “권력을 비판하는 쪽에 섰다는 이유로 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기상천외한 꼬투리를 잡혀 신속한 재판을 거쳐 3년의 실형을 살고” 있었다. 그와 달리 김기춘의 경우 “권력 부스러기를 만졌던 덕분에 일 년이 다 되도록 1심 재판조차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이는 “국민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김 교수는 김기춘이 낸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위헌 법률 제청이 있으면 재판은 원칙상 정지된다는 헌법재판소법 제42조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 단서에 법원이 긴급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재판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 기술자들의 논리 조작”을 그대로 받아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법원은 “뜨거운 감자”를 헌법재판소로 떠넘겼고 헌법재판소에서는 판단을 미루고 있다며 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지금까지 김기춘 씨 사건의 전 과정을 통하여 검찰, 법원, 헌법재판소 어느 쪽에서도 엄정하고 신속한 판단을 촉구하는 입장 표명이나 엄청난 범죄에 대한 공분을 보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한 김 교수는 “강기훈 씨 사건에서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려는 법률가의 치열한 정신도, 김기춘 씨 사건에서 엄청난 불의에 대한 법률가의 직업적 분노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옛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며 이렇게 썼다.
“법률가들에게 저주 있으라!”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 중 누구도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헌법재판소 결정은 해가 바뀌고 반년이 더 지나서야 나왔다. 1994년 7월 29일, 헌법재판소는 문제의 36조 1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한 달 후인 8월 31일,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김기춘에 대한 공소 취소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에 대해 법적으로 최종 면죄부를 받았다. 이에 앞서 1992년 12월 29일, 검찰은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참석자들 중 김기춘만 기소하고 기관장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줬다. 결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음모를 꾸민 대책 회의 참석자 가운데 법적으로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초원복집 모임을 도청해 음모를 폭로한 쪽은 사정이 달랐다. 대책 회의 참석자 중 김기춘만 기소된 것과 달리, 폭로한 쪽은 정몽준 의원 등 4명이 기소됐다. 김기춘이 낸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재판부가 받아들이면서 폭로한 쪽의 재판 절차도 정지됐는데, 위헌 결정 후 재개된 재판에서 폭로한 4명에게는 모두 실형이 구형됐다.
1994년 12월 21일, 검찰은 정몽준 등 4명에게 각각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정몽준 변호인 측은 김기춘에 대한 공소 취소 결정을 언급하며 “도둑이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는데 ‘도둑이야’라고 소리친 사람이 벌을 받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 4명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95년 3월 21일, 1심 재판부는 정몽준에게 징역 6개월에 선고 유예(형 선고를 일정 기간 동안 미루는 일)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인 제공자인 김기춘에 대한) 공소가 취소된 점 등을 고려해 형평성 차원에서 정 피고인에게 선고 유예 판결을 내린다”고 밝혔다. 선고 유예 판결로 정몽준은 의원직을 유지하게 됐다. 나머지 3명에게는 각각 징역 8개월에 집행 유예 1년이 선고됐다.
정몽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 복권됐다. 1995년 8월 11일 대통령 김영삼이 광복 50주년을 앞두고 대규모 사면을 발표하는데, 정몽준도 여기에 포함됐다. 항소 포기 후 특별 사면된 정몽준과 달리 나머지 3명은 그해 10월 5일 2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았다(벌금형으로 형량은 대폭 낮아졌다).
초원복집 사건 수사·재판에 관여한 검사들
초원복집 사건의 제2라운드는 김기춘의 완승으로 귀결됐다. 그렇다면 김기춘을 불구속 기소했던 검찰이 패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검찰은 처음부터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참석자들을 엄단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도 그러했고, 수사 결과 발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춘이 위헌 심판 제청 신청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검찰의 그런 태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검찰이 다른 사건, 예컨대 유서 대필 조작 사건에서 강기훈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들인 품의 반의반만이라도 김기춘 관련 수사 및 재판에 쏟았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이 사건 수사 및 재판에 관여한 주요 검사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의 책임자는 지검장 이건개였다. 이건개도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 때 승승장구했다. 1966년 검사가 된 이건개는 얼마 후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되고, 30세이던 1971년에는 최연소 서울시경국장이 됐다.
초고속 출세는 이건개의 부친 이용문과 박정희의 특수 관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잘나가는 일본군 장교였던 이용문은 ‘박정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박정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이러한 특수 관계는 2012년 대선에서 이건개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히고 사퇴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이건개는 김기춘과도 인연이 깊었다. 김기춘은 이건개의 서울대 법대, 검찰 선배이자 같은 ‘공안통’이었다. 1989년 검찰총장 김기춘이 공안 정국 조성에 앞장설 때 수족처럼 움직인 것이 공안합동수사본부인데, 그 본부장이 이건개였다. 공안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구속한 ‘공’을 인정받아 이건개는 서울지검장으로 승진했다.
초원복집 모임을 폭로한 정몽준 등 4명에게 각각 징역 1년을 구형한 사람은 서울지검 특수 1부 김진태 검사였다. 2013년 박근혜 정권이 검찰총장 채동욱을 찍어낸 후 앉힌 후임 검찰총장이 바로 이 김진태 검사다. 채동욱 찍어내기 작업은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이 된 후 성과를 거뒀다.
초원복집 사건 수사 당시 김진태 검사의 직속상관은 정홍원 서울지검 특수 1부장이었다. 정홍원은 박근혜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맡게 된다. 김기춘·정홍원·김진태가 박근혜 정권 첫해에 나란히 중임을 맡자 야당은 ‘초원복집 3인방의 삼각편대 재구축’이라고 비판했다.
1993년 4월 김기춘에게 공소 사실 변경 없이 징역 1년을 구형한 사람은 서울지검 공안 1부 조준웅 부장 검사였다. ‘공안통’인 조준웅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2007년)을 계기로 구성되는 삼성 비자금 특검을 맡게 된다. 삼성 비자금 특검은 ‘부실한 수사로 이건희 회장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오늘날까지 받고 있다.
초원복집 사건과 헌법재판소
초원복집 사건은 헌법재판소와 관련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건넨다. 하나는 헌법재판소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다. 헌법재판소 설치를 처음으로 규정한 것은 4월혁명(1960년) 후 등장한 제2공화국 헌법이다. 그러나 박정희 세력이 일으킨 5·16쿠데타(1961년)로 헌법재판소 설치는 백지화됐다.
헌법재판소 설치 구상은 6월항쟁(1987년)을 계기로 부활했다. 그 이듬해인 1988년 헌법재판소가 처음으로 구성됐다. 박정희를 찬양하고 민주화 운동에 적대적인 김기춘이 그러한 헌법재판소를 활용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의 독립성과 관련된 것이다. 변정수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1997년에 펴낸 회고록 <법조 여정>에서 헌법재판소 결정을 재촉하거나 막기 위해 그간 청와대 등에서 로비를 벌인 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변정수는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김기춘이 신청한 위헌 심판 건을 들었다. 1994년 7월 이 건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릴 때 헌법재판소 재판부의 일원이었던 변정수는 재직 기간에 기본권 보호를 강조하는 소수 의견을 많이 낸 재판관으로 꼽힌다.
김기춘이 신청한 건과 관련, 변정수는 1994년 청와대 비서관이 헌법재판소에 찾아와 “이 사건을 조속히 잘 처리해달라고 부탁하고 갔다”는 얘기를 다른 재판관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밝혔다. “잘 처리해달라”는 것은 김기춘 주장대로 위헌 결정을 내려달라는 것을 뜻한다.
‘초원복집 면죄부’ 박일룡, 1997년 대선에서 ‘북풍 조작’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참석자들이 법적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김영삼 정권 시기에 화려하게 복귀해 영전하며 승승장구하기까지 했다.
김기춘과 함께 초원복집에서 음모를 꾸민 기관장들 중 몇 사람의 사례를 살펴보자. 김영환(사건 당시 부산시장)은 사건 직후 직위 해제됐으나, 1994년 7월 부산교통공단 이사장으로 재기했다. 헌법재판소에서 김기춘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헌 결정을 내린 바로 그달이다.
우명수 부산교육감은 초원복집 사건이 불거진 후에도 1995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초원복집에서 지역감정 조장을 주문한 김기춘에게 맞장구쳤던 우명수(“우리는 지역감정이 좀 일어나야 돼.”)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부산 교육의 수장 역할을 했다. 정년퇴직한 해에는 훈장도 받았다.
사건 당시 부산지검장이었던 정경식, 부산경찰청장이었던 박일룡 사례는 더 기가 막히다. 정경식은 사건 석 달 후(1993년 3월) 한직인 대검 공판송무부장으로 좌천됐으나, 1993년 9월 대구고검장으로 영전하며 부활했다. 1년 후(1994년 9월)에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정경식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지명한 사람은 대통령 김영삼이었다(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법원장, 국회, 대통령이 각각 3명씩 지명).
정경식이 걸어온 길은 ‘헌법재판소 재판관에 적합한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정경식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잘나가는 공안 검사였다. 1980년 봄 정경식이 모교인 고려대에 출강한다고 하자, 학생들이 ‘유신 검사’의 강의를 받을 수 없다며 저지 시위를 할 정도였다.
그해에 정경식은 국보위 사회정화위원회(삼청교육대를 담당한 바로 그 위원회다)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에 더해 초원복집 모임 연락책까지 했는데도, 김영삼의 추천을 받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박일룡은 초원복집에서 김기춘이 선거 부정에 대한 양해를 주문하자 오히려 한 술 더 뜬(“이거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 인사다. 사건 직후 직위 해제됐던 박일룡은 1993년 3월 중앙경찰학교장에 임명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해 9월 치안정감으로 승진하며 해양경찰청장에 임명됐다. 1994년 7월 서울경찰청장으로 영전했고, 불과 5개월 후(1994년 12월)에는 경찰청장으로 올라섰다. 초원복집 사건 2년 만에 김영삼이 고교 후배이기도 한 박일룡을 경찰 총수로 발탁한 것이다.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들에 대한 면죄부는 또 다른 공작 정치를 불러왔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려 정권 교체를 막고자 극우 반공 세력이 기획한 ‘북풍 조작’이 그것이다.
1996년 12월 안기부 1차장으로 옮긴 박일룡은 안기부장 권영해와 함께 북풍 조작의 핵심 실세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1998년 구속된다. 안기부의 대북 비밀 공작원이었던 박채서(암호명 흑금성)는 북풍 조작의 실질적 책임자로 박일룡을 지목했다.
권력 중심부 복귀 위한 징검다리로 애꿎게 선택된 야구
박일룡, 정경식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김영삼 정권은 부산 지역 기관장 대책 회의 참석자들을 중용하며 살뜰하게 챙겼다. 김영삼 정권이 표방한 개혁의 성격과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중 하나다.
그러한 김영삼 정권이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 김기춘을 모른 척할 리 없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내린 후 정관계에는 김기춘이 다시 중용될 것이라는 설이 퍼졌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라는 시각도 있긴 했지만, 초원복집 모임에 참석한 기관장들처럼 김기춘도 중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삼 정권은 그러한 우려를 현실로 만든다. 다만 단번에 김기춘을 중용하는 대신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김기춘을 곧바로 고위직에 앉힐 경우 정권이 져야 할 부담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단계로, 검찰의 공소 취소 결정 넉 달 후인 1994년 12월 19일 김기춘을 민자당 국책자문위원에 위촉했다. 공작 정치 주역의 재등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김영삼 정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달(1995년 1월), 김기춘이 한국야구위원회(KBO) 차기 총재에 내정됐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렇게 김기춘은 애꿎은 야구를 징검다리 삼아 다시 권력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