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결국 중간고사를 망쳐버렸다. 고등학교 첫 시험이었다. 중학교 시절 줄곧 반 1등을 맡아오던 17살 최동빈(가명) 군은 달라진 환경과 심한 긴장 탓에 지난 1학기 중간고사를 제대로 못 치렀다.
하필 몸도 좋지 않았다. 떨리는 손을 겨우 부여잡고 OMR 카드에 정답을 표기해도 긴장은 또 긴장을 낳았다. 연신 손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최 군을 보며 친구들과 부모님은 “괜찮다” 위로했지만 최 군은 좀처럼 괜찮아지지 않았다.
‘꿈을 잃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최 군의 꿈은 의사다. 어렸을 때부터 꿈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을 연구하고 싶어 감염내과 전문의가 되고자 한다. 지금껏 최 군은 공부를 주로 혼자 했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 학원은 동생에게 양보하고, 대신 부족한 부분을 인터넷 강의로 보충했다.
다행히 효과가 컸다. 경기도에 위치한 A 일반 고등학교에 손꼽히는 성적으로 입학했고,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지난 1학기 중간고사를 망치고 상황이 변했다. 선생님은 최 군을 불러 꿈을 앗아갔다. 의대 지원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조언한 것이다.
“선생님이 앞으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는 의대가 아닌 생명과학부 쪽으로 꾸미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이 내신으로는 의대를 학종으로 지원하기 힘들다면서.” – 최동빈(가명, 17살)
어떻게 단 한 번의 부진이
고1의 꿈을
접게 할 수 있나요?
어떻게 시험 한 번 망쳤다고 꿈을 포기해야만 할까? 그 배경에는 학생부 종합전형(학종)의 확대가 있다. 학종으로 상위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첫 단추부터 잘 꿰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고1 때부터, 내신은 물론이고 희망 학과에 맞춰 전략적으로 학생부를 꾸려야 하는 것이 학종이다.
학종은 학생부와 자기소개서 등을 토대로 지원자의 고교 3년간 기록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내신, 봉사, 동아리, 독서 등을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를 하는 것이 핵심이다. 가파른 증가 추세 때문에 선택이 아닌 필수 준비 사항이 됐다. 2014년 입학사정관제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당시 12.4%였던 비율은 현재 두 배(2018년 대입 기준 23.6%)에 이르렀다.
일명 ‘좋은 대학’일수록 학종을 더 선호한다. 올해 주요 8개 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KAIST, 포스텍)은 전체 모집인원의 54.3%를 학종으로 뽑았다. 서울대는 올해 무려 전체 정원의 79.1%를 학종으로 선발했다.
전공구분 없이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만든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 지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고1이 되자마자 ‘완성된’ 꿈을 정하고 고교 3년간의 생활기를 ‘완벽한’ 스토리로 꾸며야 하는 게 학종이다. 뒤늦게 정신차린 학생이 들어갈 틈은 없다.
고1부터 완성된 꿈에 맞춰
스토리 꾸미도록 강요하는
‘학종’
수능을 잘 쳐서 정시로 입학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 마저도 쉽지 않다. 학종 문이 커지는 만큼 정시 문은 계속 좁아졌다. 2014년 수능 위주 대입 모집인원은 전체의 33.8%였던 반면, 2018년에는 26.3%에 불과한다. 아무리 수능을 대박 터뜨려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보장이 줄어든 것이다.
일반고등학교가 학종으로 목을 매는 이유에는 이런 사정이 깔려있다. 정시가 바늘구멍이 되자 최 군이 몸담고 있는 고등학교를 포함한 일반고에서는 학종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재수생 N수생들이 좁은 정시문에 바짝 다가서 있으니 재학생이 살아남는 방법은 학종뿐이라는 판단에서다.
17살 최 군은 억울했다. 한 학기의 작은 시험이 자신의 진로를 바꿔 놓을 줄 몰랐다. 숱한 선생님들이 말한 “노력하면 언젠가 빛을 본다”라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수시는 물거품이 된 듯했고, 정시로 패자부활전을 치르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아 보였다.
최 군은 주변의 조언대로 고1 성적에 맞는 꿈으로 바꾸고 연기를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치졸하고 거짓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청와대 국민 청원에 글을 올렸다. 하지만 청와대가 공식 답변하기로 한 기준선 20만 명에 한참 못 미친 561명의 참여만 받고 청원은 끝이 났다.
<최동빈 군이 작성한 ‘청와대 국민 청원’ 중 일부>
제 꿈의 근처에라도 가보고 싶습니다. 노력의 문제가 아닌 단순히 제도상 수시의 비중이 매우 커 노력해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얼마나 허탈할까요. 대통령님! 한 사람만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아닙니다. 그들을 대표해서 쓰는 거라는 것을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시작이 부진했더라도, 고난이 있었더라도 최종적으로 항상 잘해왔던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48946?navigation=petitions
“번지르르 포장했더니 학생부 잘 썼대요”
패자부활전 없는 입시 풍토만이 학종에 대한 불신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에 앞서 많은 학생들은 학종의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는 학생부 자체에 대해서 큰 회의를 느끼고 있다. 학생부가 학생의 능력과 잠재력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방향으로 변질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먼저, 내실보다 포장으로 점철된 학생부를 꼬집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대다수의 학생들은 고1 때부터 희망 직업에 맞춰 ‘스토리’ 혹은 ‘테마’를 짜서 학생부를 관리했는데, 이는 때때로 정도를 넘어선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진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희망 학과에 따라 본인의 가치관과 활동을 끼워 맞춰 각색하도록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스토리텔링’이
핵심이 된 학생부,
진로에 맞춰 가치관마저 각색
최 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기소개서 쓰기 대회’에서 느낀 부끄러웠던 경험으로 학생부의 실태를 설명했다. 최 군의 진로 선생님은 학생부나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과장해서, 그리고 일관되게 써야 한다”고 교육했다고 했다. 애초에 진로 수업은 진학에만 국한됐다. 학생부를 관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꿈이나 직업에 대한 궁금증은 늘 대입보다 뒷전이었다.
질끈 눈을 감고 선생님의 가이드라인대로 자기소개서를 쓴 최 군은 결국 대회에서 3등을 수상했다. 물론 과장과 각색 덕분이었다. 수학 동아리에서 친구들과 가볍게 읽은 글을 수학에 결정적으로 관심을 안겨준 계기로 꾸미고, 없던 갈등을 극복했다고 거짓말을 해 이룬 성과였다. 수상 결과는 최 군의 학생부에 기록됐지만 당당할 수 없었다. 부끄러움과 맞바꾼 수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저를 속이면서까지 대학에 진학하고 싶지 않아요. 겨우 17살, 18살, 아직 많은 걸 겪지 못한 학생들이 꿈을 굳이 일관성 있게 가져야 할까요? 가치관이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학생이니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요? 잘못되면 수정하고, 고치고 하면서요. – 최동빈(가명, 17살)”
비교과 늘리기에 ‘페이퍼 동아리’까지 등장
학생들은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남몰래 가장 뻗치기 쉬운 영역은 비교과 영역이라고 말했다. 비교과 영역은 말 그대로 교과 외 영역에서 학생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든 항목으로, 상대적으로 자유도가 커서 학생 간의 차이도 그만큼 크다. 자율동아리, 연구활동, 봉사, 진로체험, 독서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데 상대적으로 선생님의 관리 감독이 소홀한 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조작이 쉬운 영역은 독서 활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이 일일이 완독 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쓰거나 부모님이나 학원이 대신 써준 기록이 학생부에 올라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증언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교육부는 지난해부터 책 제목과 저자만 쓰도록 지침을 수정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상태다.
페이퍼 동아리(?)가 성행한다는 고백도 나왔다. 경남의 한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이희준(가명, 19살) 학생은 스펙 쌓기 용으로 동아리를 반짝 만들었다가 없애는 사례를 재학 3년 동안 숱하게 봤다고 말했다. 대략 10%의 자율동아리는 활발히 활동하지만, 대다수의 동아리는 한 줄 스펙용으로 쓰이고 금세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동아리 회장이 하나의 스펙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동아리가 난립하는 거죠. 어떻게든 학생부에 한 줄 채우면 나쁠 게 없으니까요. – 이희준(가명, 19살)”
학생부 질은 엄마가 만든다?
더 큰 문제는 비교과 준비가
점차 엄마들의 ‘장외 경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이 내신과 수능을 준비하면서 비교과까지 챙기기 어렵기 때문에 부모님의 발품 정도에 따라 비교과 스펙이 판이하게 갈릴 수 있다고 했다. 일례로 봉사활동을 들었다. 희망 학과와 연계되는 봉사 활동을 학생의 엄마가 ‘1365 자원봉사포털’이나 지역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 알아봐 주고 연결한 사례를 흔히 본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부모의 인맥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부모가 재직하거나 가까운 지인이 다니는 전문기관에 아이의 꿈과 연결되는 봉사활동을 연결해 ‘우리 아이는 인성과 열정마저 갖춘 인재’라는 내러티브를 학생부에 심어주는 게 가능했다. 의사를 꿈꾸면 병원으로, 교사를 꿈꾸면 어린이집으로 봉사를 가 전공적합성을 높이는 것이다.
고급 스펙으로 꼽히는 ‘소논문’은 그중에서도 부모님의 손을 가장 많이 타는 항목이었다. 연구 주제를 정하거나 연구실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모님이 전문가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실제로 서울대의 한 교수가 자신의 아들을 고등학생 시절부터 10년간 논문 공저자로 등록해왔던 사건은 학종이 현대판 음서제라는 별명을 굳히는데 일조했다.
“봉사활동은 부모 백으로, 자율동아리는 부모가 다른 부모들을 모집해서 한 사람이 주축이 돼 학원의 도움을 받아 주제와 결과물을 만들어주고, 학교에선 실험하는 시늉만 하고, 독서도 학기당 20권씩 하는 양을 소화할 수 없기에 실제 본인이 읽는지 안 읽는지 알 수 없고, 소논문은 학원에서 만들어주거나 운 좋게 교수 부모를 둔 아이가 쓰거나 하게 되는 겁니다. – 고1 학부모 박승주”
어쩌면 이 공식을 일찍 깨달으면 다행일지 모른다. 독서실에 앉아 밤낮으로 교과서만 들여다보면 결실을 맺을 줄 알던 학생들은 뒤늦게 자신의 뒤처진 상황을 파악하고 좌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뒤늦게 남은 선택권인 정시를 치르며 또 좌절한다. 학종이 싫어 자퇴를 결심했던 한 학생은 자신의 3년을 뒤돌아보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시가 공정해서 정시를 선택한 게 아니에요. 뒤처진 출발선을 그나마 따라잡을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어요. – 이은샘(가명, 19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