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타고 바다로 간 아버지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김양식장 일을 마치고 육지에 닿았으나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산 명지항에서 대기하던 두 남자가 아버지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버지는 얼마 뒤 저녁 TV 뉴스에 나왔다. 두 손목에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이다. 아버지의 친구 장동익 아저씨도 같은 모습이었다. 뉴스 앵커가 아버지에 대해 이런 취지로 말했다.
“부산 사하경찰서는 낙동강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부녀자를 강간살인한 범인 두 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둘을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고 있습니다.”
사진기자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TV 속 아버지의 검은 얼굴이 도드라졌다. 옆에서 TV를 보던 엄마 입이 떡 벌어졌다.
“세상에.. 저게 뭔 소리냐? 네 아빠가 사람을 죽였다니..”
아버지의 검은 얼굴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 최인철(당시 29세)도 TV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치장 철창 밖 TV 화면 속 인물은 자신과 친구 장동익이 분명했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용의자가 되어 방송에 나오는 상황. 아버지는 아내처럼 놀랐지만 곧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었다.
그때까지 아버지 최인철은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을 잡으려는 올가미가 사방팔방 촘촘히 설치되는 걸 말이다. 혼자 힘으로는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자신은 곧 짐승처럼 울부짖게 되리란 걸, 살아서는 세상 밖으로 못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예측 못 했다.
아들 최규현(가명)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고아처럼 살고, 오랫동안 ‘살인범의 아들’로 살아야 한다는 걸 그땐 몰랐다. 당시 최규현은 고작 일곱 살이었다. TV 뉴스는 작은 신호에 불과했다.
최규현, 최혜영(가명. 당시 4세) 남매의 아버지 최인철(당시 29세)이 부산 명지항에서 사하경찰서로 끌려간 날은 1991년 11월 8일 오후. 친구 장동익은 같은 날 저녁 집에서 연행됐다. 경찰은 최인철을 경찰서 내 작은 방으로 데려갔다.
“옷 벗어.”
경찰은 속옷만 입은 아버지를 간이 침대에 앉히고 몸 곳곳을 살폈다. 손으로 뒤통수를 때리고, 귀밑 머리를 잡아당겼다.
“솔직히 말해. 마약 하지? 네가 사는 명지동에 마약하는 애들 많잖아. 두 명만 대. 그러면 우리가 잘해 줄게.”
노태우 정부가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에 따라 경찰이 부산하게 움직일 때였다. 경찰이 진정으로 원한 건 마약사범이었을까? 아니다. 경찰은 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들에겐 무서운 목표가 있었다.
‘특진이 걸린 미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보자. 고문을 해서라도.’
부녀자 박수경(가명. 당시 30세)이 부산 엄궁동 낙동강변 갈대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때는 1990년 1월 4일 이른 아침. 그녀의 오른쪽 머리 피부는 가로 15cm, 세로 6cm로 파열돼 있었다. 그 안쪽 두개골은 가로 13cm, 세로 16cm가 함몰 및 불쇄골절된 상태였다.
시신의 머리는 동남쪽, 다리는 북서쪽으로 놓여 있었다. 두 팔은 ‘만세’를 외친 듯이 머리 위로 길게 펼쳐졌고, 웃옷은 목까지 말려 올라간 상태였다. 등에는 땅에 끌린 듯한 상처가 많았다. 이런 시신은 몇 가지를 추측하게 한다.
‘머리는 크고 무거운 도구에 충격을 받았다. 범인은 근처에서 여성을 살해하고 갈대밭에 유기했다.’
현장 강변 돌무더기에서는 시선을 끌고 온 듯한 긴 혈흔이 발견됐다. 점점이 약 50미터 이어진 혈흔의 끝, 아직 완공되지 않은 강변 도로에는 검은색 로얄프린스 차량 한 대가 있었다. 차 옆 인도 보도블럭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다. 근처에는 많은 피가 묻은 가로 45cm, 세로 17cm 크기의 모난 돌이 있었다. 다시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차 옆에서 큰 돌로 여자 머리를 내리친 뒤에 강변 갈대밭으로 끌고 가 유기했다’
달도 뜨지 않은 그날 새벽, 박수경은 직장 동료 정현덕(가명. 당시 35세)과 함께 로얄프린스 승용차를 타고 낙동강변에 있었다. 정현덕 주장에 따르면, 성인 남성 두 명이 차를 덮쳤다. 정현덕은 현장에서 혼자 탈출했다. 몇 시간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박수경 시신을 발견했다.
달이 뜨지 않은 밤, 가로등도 없는 곳에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일까? 정현덕은 범인과 격투까지 벌였다면서 구체적인 인상착의를 경찰에 말하지 못했다. 그 탓에 경찰은 몽타주도 못 그렸다. 아래 정보가 다였다.
범인1 – 신장 약 170cm. 체격 좋고. 둥글 넙적한 얼굴. 부산 말투.
범인2 – 신장 약 165cm. 보통 체격. 얼굴이 야윈 편. 부산 말투.
이런 남자는 부산에만 수천 명 존재할 터. 경찰은 아무 단서도 못 찾고 약 1년 10개월을 보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질 무렵, 최인철과 친구 장동익이 사하경찰서로 끌려갔다. 마을 청년들과 함께 철새도래지를 관리하던 최인철은 부산 을숙도에서 불법으로 운전 교습을 하는 한 시민에게 3만 원을 수령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경찰은 최인철에게 이상한 걸 물었다.
최인철은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김양식장에서 일했다. 부모님은 10대 때 모두 돌아가셨다. 시각장애인 친구 장동익은 초등학교 6년 과정을 다 마치지 못했다. 김공장에서 일하다 경찰에 끌려왔다. 둘 모두 가난했다. 집안에 ‘힘 좀 쓰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살인범 조작을 위해 은밀하고 촘촘하게, 때로는 거침없이 대담하게 움직였다. 조작에도 단계와 절차가 있는 법. 경찰은 우선, 두 사람을 오래 잡아둬야 했다. ‘3만 원 수령 의심’으로는 구속수사가 어렵다고 판단했을까?
사하경찰서는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최인철이 무려 범죄 19개를 저질렀다는 문서를 근거도 없이 만들었다. 낙동강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2만 원~3만 원의 돈을 받았다는 것인데, 거의 대부분 피해자는 물론 사건 발생한 날짜조차 특정되지 않았다. 11월 9일 오후 구속영장이 나왔다. 경찰의 ‘1단계 작업’ 성공, 최인철은 조금씩 수렁에 빠졌다.
경찰은 낙동강 부녀자 살인사건으로 바로 건너가지 않았다. ‘2단계 작업’ 시작, 경찰은 징검다리 건너듯 다른 사건 하나를 거쳐 가기로 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최인철, 장동익이 사하경찰서로 끌려간 지 사흘째인 1991년 11월 11일. 경찰은 둘을 차에 태워 부산 중부경찰서 식당으로 갔다. 여기 근무하는 한OO 경찰이 잠시 뒤 나왔다. 한OO은 둘을 보고 대뜸 말했다.
“이 자식들, 니들 나 알지?”
최인철은 누군지 몰라 당황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장동익도 마찬가지다. 장동익은 사하경찰서로 돌아갔다. 경찰 여러 명은 최인철을 하단1동 파출소 3층 옥탑방 같은 가건물로 데려갔다. 실내로 들어가자 누워서 역기를 들어올리는 운동기구 역기대가 보였다.
“웃통 벗고 누워.”
최인철은 무슨 말인지 몰라 경찰을 바라봤다. 한 경찰이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안 들려? 누우라고 이 OO야!”
최인철은 경찰이 눈짓으로 가리키는 역기대 위에 상의를 벗고 누웠다. 경찰은 최인철에게 역기를 올려놓는 세로 봉을 양손으로 끌어안게 한 뒤 손목에 휴지를 감고 수갑을 채웠다. 최인철의 머리를 바닥 쪽으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수건을 덮었다. 경찰 한 명이 최인철 배 위에 앉았다. 얼굴에 찬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짐승의 시간’이 시작됐다.
최인철은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다시 겨울 낙동강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배에 올라앉은 경찰이 다시 물었다.
“1989년도 12월에 낙동강에서 강도짓 했어, 안 했어? 인정하면 왼손 검지 까딱까닥 움직여.”
말로만 들던 물고문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최인철은 물고문 2~3시간 만에 녹초가 돼 “다 인정한다, 원하는 대로 말하겠다”며 항복을 선언했다.
이렇게 살인범 조작을 향한 경찰의 ‘2단계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여기서 잠깐, 경찰이 물고문으로 최인철에게 항복을 받아낸 ‘1989년 12월 낙동강 강도사건’은 도대체 뭘까? 중부경찰서 소속 경찰 한OO가 깊은 밤 한 여성과 차를 타고 낙동강변에 있었는데, 2인조 강도 습격으로 7만 원을 빼앗겼다는 사건.
사실 이 사건은 실체가 모호하다. 한OO은 강도 피해를 당했다면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사건이 벌어진 날짜를 특정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약 2년이 지난 뒤 갑자기 범인으로 최인철, 장동익을 지목했다. (추후 자세히 보도 예정)
사하경찰서 유치장으로 돌아간 최인철은 그날 밤 다시 별관으로 불려갔다. 형사7반 주임 허OO이 물고문으로 기선이 제압된 최인철에게 물었다.
“낙동강에서 네가 저지른 사건이 하나 더 있지? 작년 1월 4일 새벽, 엄궁동에서 여자 죽인 적 있지? 장동익이랑 같이.”
최인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경찰은 다시 최인철 손목에 휴지를 감고 수갑을 채웠다. 그 상태로 쪼그려 앉아 무릎을 감싸쥐게 했다. 한 경찰이 은빛 쇠파이프를 들고와 최인철 무릎과 팔 사이에 꽂았다. 경찰 두 명이 양쪽에서 쇠파이프를 들어 책상과 책상에 걸었다.
두 아이의 아버지 최인철은 통닭처럼 머리가 아래쪽으로 떨어졌다.
경찰은 최인철 얼굴에 수건을 덮고 ‘살인범 창조’ 작업을 시작했다. 최인철은 몸부림 쳤다. 낮에 배에 올라 앉았던 그 경찰이 말했다.
괴롭지? 빨리 끝내자, 응? 네가 죽였어, 안 죽였어? 인정하면 왼쪽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여. 그럼 풀어줄게.”
살인죄를 뒤집어 쓰라니. 최인철은 견디다 정신을 잃었고, 그러면 경찰은 뺨을 치며 깨웠다. 깨어나면 다시 ‘통닭구이’ 물고문 시작. 최인철은 “차라리 죽여 달라!”라고 애원했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다.
구타는 아니었다. 쇠파이프가 몸무게 탓에 휘어져 최인철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다. 최인철은 ‘이렇게라도 물고문이 끝나는구나’ 안도했다. 하지만 경찰의 기술은 다양했다. 포기도 몰랐다. 최인철을 책상에 눕혀 머리를 바닥 쪽으로 향하게 한 후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고문은 모든 의지와 저항을 꺾었다. 최인철은 왼쪽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살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2차 항복 선언. 이렇게 최인철은 강도에 이어 강간살인범으로 다시 태어났다.
경찰은 이제 ‘받아쓰기’를 시켰다. 최인철은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남자(정현덕)를 낙동강에 내가 먼저 끌고가 물 좀 먹이고 때렸고, 또 내가 다시 승용차에 있던 여자를 끌어내려 옷 벗기고 강간을 한 번 하고, 팔뚝 만한 두께의 길이 50cm 정도의 각목으로 여자 어깨를 친다는 것이 (잘못하여 여자가) 머리를 맞고 쓰러지길래 놀래서 (여자를 끌고 강변) 뚝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중략) 이제 실토하니 마음이 후련하고 편안합니다.” – 1991년 11월 11일 최인철 자술서
사건 실체와 맞지 않는 엉터리 자술서. 이들은 최인철의 꿈과 눈물까지 조작했다.
“꿈에 이쁜 여자를 만나 가까이 더 가보면 얼굴이 피범벅이고, 머리카락으로 목을 조르는 무서운 꿈을 꾸는 등 고통을 당했습니다. (중략) 장동익과 술을 나눠 마시고 사고를 친 것이 겁도 나고 후회도 되고 하여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동안 울었습니다.” – 1991년 11월 11일 사하경찰서 작성 최인철 1차 진술조서
허위자백을 확보한 경찰은 현장검증을 위한 예행 연습도 시켰다. 11월 13일 늦은 오후, 경찰은 최인철을 차에 태워 살인사건이 발생했던 엄궁동 낙동강변으로 갔다. 현장에서 경찰은 최인철에게 “여기가 사건 발생한 장소니까, 잘 기억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강을 건너면 최인철이 나고 자란 땅이자, 그의 집이 있는 부산 명지동. 최인철은 일곱 살, 네 살 남매와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는 울먹이며 경찰에게 말했다.
“멀리서나마 집을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집 근처라도 한 번 들렀다 갑시다.”
경찰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차는 사하경찰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틀 뒤인 11월 15일, 최인철과 장동익은 현장검증을 했다. 경찰이 시키는 대로 최인철이 각목으로 여자를 때려 죽인 뒤, 둘이서 시신을 유기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일이 벌어졌다. 최인철이 각목으로 여자를 때려 죽였다고 조작했지만, 이는 실체와 맞지 않다고 윗선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온 듯했다. 사하경찰서는 다시 조작을 해야 했다. 늦은 밤 경찰이 장동익을 별관으로 불렀다.
“각목으로 두 대 때렸다고 사람 두개골이 함몰되겠어? 솔직히 말해봐, 장동익 네가 돌로 때려 죽였지?”
장동익은 부인했다. 경찰은 그를 거꾸로 매달고 물고문을 시작했다. 장동익은 저항하며 “최인철을 불러달라”라고 했다. 진술을 다시 꿰맞춰야 하니, 어차피 최인철도 불러야 했다. 그가 왔을 때 장동익은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최인철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다. 소용없었다. 이번엔 그가 또 물고문을 받을 차례. 역할을 바꿔 장동익이 돌로 여자를 때려죽인 것으로 입을 맞춰야 했다. 얼마 뒤 마지막 퍼즐처럼 둘의 진술은 이렇게 조작됐다.
“차량 옆에서 최인철이 각목으로 머리를 두 대 때리자 여자가 쓰러졌습니다. 강변에서 장동익이 주먹 만한 돌로 한 번 쳐서 죽였습니다.”
이 진술에 맞게 두 사람은 11월 16일 다시 현장검을 했다. 최인철과 장동익은 1991년 11월 18일 검찰로 송치됐다. 검찰에 가면 경찰에서 했던 허위자백을 모두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첫날부터 부질없는 일이 됐다. 사하경찰서 소속 경찰 다섯 명이 검찰까지 따라왔다. 부산지검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교육이 시작됐다.
최인철은 겁을 먹었다. 송치된 당일 부산지검 특별수사부 조사실에서 있었던, 검사와 첫 대면. 이 중요한 순간은 동영상으로 녹화됐다. 이 자리에서 최인철은 범행을 부인하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이어갔다. 자신을 고문했던 경찰들이 가끔씩 들어와 그를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11월 22일 최인철은 두 번째 소환 때부터 용기를 냈다.
“지난번 진술은 호송경찰관이 저를 데려왔기 때문에 겁이 나서 경찰서에서 진술한 대로 말을 했습니다. 저는 강도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낙동강에서 여자를 죽인 적도 없습니다.”
11월 25일, 4차 피의자 진술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검사는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잔인하게 물었다.
- 검사 : 피의자는 사람을 죽인 죄가 얼마나 중한지 모르나요?
최인철 :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검사 : 사람을 죽이면 자기도 죽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 지금까지 질문한 내용들은 모두 살인사건이나 강도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들인데 죽을 각오를 하고 허위로 꾸며댔다는 말인가요?”
최인철 : 고통을 못 참아서 억지로 꾸며서 대답한 겁니다.
- 검사 : 고통이 무엇을 말하는지(뜻하는지) 모르나 죽는 것 이상은 아니었을 텐데, 피의자는 범행을 하였기 때문에 범행 사실을 아주 소상히 털어놓았던 게 아닌가요?
최인철 : 그 고통을 안 당한 사람은 모릅니다.
- 검사 : 당신이 범행을 했기에 (고문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못하는 것 아닌가요?
최인철 : 저는 강력하게 항의할 힘도 없습니다.
이듬해 1월부터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최인철은 살인, 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그의 무죄를 위해 법정에서 1990년 신정 연휴 때 알리바이를 증언한 처남은 위증죄로, 아내는 위증교사 혐의로 구속됐다. 그야말로 한 집안이 초토화됐다.
해가 바뀌어 한 살씩 더 먹은 최규현(8세), 최혜영(5세) 남매는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됐다. 최규현은 작은 삼촌, 최혜영은 큰 삼촌 댁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졸업한 명지초등학교에 입학한 최규현은 수업을 마치면 작은 삼촌 집으로 가지 않았다. 작은 냇가의 다리를 건너 ‘오늘은 엄마, 아버지가 돌아왔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살던 집으로 향했다. 울면서 빈집에서 엄마, 아버지를 기다렸다.
아들 최규현이 작은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할 때, 아버지 최인철은 삶이 걸린 운명의 다리 한복판에 있었다. 아버지의 말을 믿어주지 않던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범죄 혐의를 입증할 명백한 물적 증거도 없이 말이다.
“피고인들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저버리고 야수의 길을 선택하여 도저히 이들에게 관용이나 동정을 베풀 여지가 없음을 확신합니다. (중략) 피고인들을 극형(사형)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법원까지 판단은 같았다. 최규현은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자랐다. 가끔씩 그가 교도소로 가 아버지를 만났다. 공유하는 일상이 없으니, 시간이 갈수록 서로 할 말은 점점 줄었다. 최규현은 가족 아닌 사람에겐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살았다.
아버지 최인철은 감형을 받아 21년 7개월여 만인, 2013년 6월 24일 자정 무렵 출소했다. 최규현은 삼촌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으로 갔다.
드디어 교도소 철문이 열렸다. 문 안쪽에서 20대에 끌려간 아버지가 50대가 되어 걸어 나왔다. 일곱 살이던 어린 아들이 아버지보다 덩치가 큰 20대 후반의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맞았다. 기쁠 줄 알았는데, 둘은 서로를 보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2016년 10월 1일, 최규현은 25년 만에 다시 TV에 나오는 아버지를 봤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아버지 사건의 진실을 다뤘다. 예전과 다른 건, 아버지 최인철, 장동익 아저씨와 함께 봤다는 점이다.
TV 속에서 아버지는 25년 전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서 말했다. 아들에게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최규현은 충격을 받았다. TV 시청을 마치고 최규현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때처럼 눈을 감아도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와 있길 바라며 건넜던 다리, 뿔뿔이 흩어진 가족, 텅빈 집, 아버지 이야기를 피하고 살아온 세월, 물고문, 엄마의 구속..
최규현은 그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