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 출범 직후인 2013년 3월 초, 부산일보에 김기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다. 그동안 맡았던 여러 직책 중 가장 재미있는 자리가 뭐였냐고. 김기춘이 주저 없이 답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 총재”라고.
그랬다. 김기춘은 한때 한국 야구의 수장이었다. 이를 낯설게 여길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김기춘 총재 퇴임 후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이 아니라, 김기춘과 야구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도 그러할 것이다.
김기춘 총재 내정에 야구계 “낙하산식 인사에 넌더리”
1995년 1월, KBO 차기 총재에 김기춘이 내정됐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김기춘에게 KBO 총재 자리를 제안한 곳은 안기부였다. KBO 총재 인사에 안기부가 밀실에서 관여한 것은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시절이었다. 안기부가 대통령 직속 기관임을 고려하면, 이것이 누구의 뜻에 따른 조치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야구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또 낙하산 인사냐는 것이었다. 1982년 프로 야구가 출범한 이래 KBO 총재는 모두 야구와 무관한 인사들이었다. 정권이 특정 인사를 시쳇말로 내리꽂으면 구단주들이 두말없이 총재로 모시고, 야구인들은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하는 구조였다.
이는 프로 야구가 전두환 정권의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책의 일환으로 출범했다는 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출발이 그랬다고 하더라도, 낙하산 방식을 고수하는 건 정당화될 수 없었다.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긴 했지만, 프로 야구가 출범할 때에 비하면 사회 전반적으로 민주화 쪽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또 낙하산 총재를 보낸다고 하니 야구인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야구인들 사이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교 후배인 김기춘 씨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청와대 측이 낙하산식 인사”, “KBO 총재의 낙하산식 인사에 넌더리가 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스포츠 기구에 “하필이면” 초원복집 사건 주역 앉히다니
두 번째, 김영삼 정권 출범 후 KBO 총재가 지나치게 단명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까지 KBO 총재를 맡았던 사람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1·2대 총재 서종철은 박정희 정권 때 육군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참모총장 시절 전두환과 노태우를 부관으로 거느렸다. 서종철은 KBO 총재로 6년 넘게 재임했다.
3·4대 총재 이웅희는 기자 출신으로 문화공보부 장관 등을 지냈다. 노태우 집권기에 KBO 총재로 4년 넘게 재임했다. 5대 총재 이상훈은 전두환·노태우와 육사 11기 동기다. 본래 전두환·노태우의 사조직 하나회와 대립하는 쪽이었지만, 그 후 상황이 바뀌면서 전두환 집권기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고 노태우 정권 때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적어도 한 번은 임기를 채운 서종철, 이웅희와 달리 이상훈부터는 중도 하차가 이어졌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1993년, 이상훈은 1년여 만에 KBO 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방부 장관 시절 율곡 사업(군 전력 현대화 사업)과 관련해 검은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6대 총재는 오명이었다. 김영삼 정권 들어 처음으로 취임한 KBO 총재였는데, 재임 기간은 26일에 불과했다. 교통부 장관 입각이 결정되자 오명은 바로 KBO를 떠났다. 후임은 김영삼 정권의 초대 국방부 장관 권영해였다. 7대 총재 권영해는 안기부장으로 임명되면서 9개월여 만에 KBO를 떠났다. 그 후임으로 김영삼 정권이 보낸 사람이 김기춘이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잠깐 거쳐 가는 자리로 KBO 총재가 전락했다’는 얘기가 야구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야구계에서 반발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초원복집 사건(1992년)이었다. 김기춘 총재 내정 소식이 퍼지자 야구계에서는 “초원복집 사건으로 물의를 빚은 인물이 아니냐”는 얘기가 바로 나왔다. KBO 총재 자리가 아무리 낙하산 인사로 점철됐다고는 해도, 페어플레이를 내건 야구의 수장으로 ‘초원복집’ 김기춘을 보내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언론에서도 똑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공정한 룰의 집행이 생명인 스포츠 관련 기구에 하필이면 룰을 송두리째 무시해 실망과 충격을 안겨준 인물을 앉힌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비판했다. “하필이면”, 이것만큼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을 총재로 모셔야 하는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적잖은 야구인들의 심정을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KBO 총재 취임 후 “저는 어제의 김기춘이 아닙니다”
반발은 묵살됐다. 구단주들은 그동안 해온 대로 정권에서 지명한 인사(김기춘)를 총재로 추대했다. 총재 취임(1995년 2월 8일) 후 김기춘은 공익성과 상업성의 조화를 추구하고, 전용 경기장 건설 등 현안 해결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고교 팀 창단 등을 통해 야구의 저변을 확대하고 아마추어 야구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모범 답안도 내놓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안들 중 김기춘 총재 재임 기간에 열매를 맺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취임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총재 내정 후 나온 반발 목소리에 나름대로 답했다. 먼저 “모교인 경남고가 야구 명문”이며, “고교 시절엔 야구를 하면서 놀기도 했고 대학에서도 공 던지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야구와 인연이 없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다. 낙하산 인사임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인 셈이다.
‘또 다른 자리를 찾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KBO 총재 자리를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김기춘은 “말년에 정열을 바칠 수 있는 천직”으로 여기고 있다고 답했다. 전임 총재의 잔여 임기(1997년 3월까지)를 마치는 것은 물론 그 이후에도 KBO 총재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나 김기춘에게 KBO 총재 자리는 “천직”이 아니라 징검다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김기춘은 반성을 많이 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부족한 과거”, “어두운 과거”로 규정하고 그간 “근신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보냈다고 강조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어제의 김기춘이 아닙니다. (19)92년의 김기춘은 더욱 아닙니다.”
구정물·통신비밀보호법 발언에 비춰 본 반성 없는 속내
깊이 반성했다는 김기춘의 얘기는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서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도 반성과는 거리가 먼 속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얘기했다.
“달밤에 깨끗한 비단옷 입고 가는 나그네였는데 구정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유신 헌법 제작 관여(1972년), 조작 간첩 제조 사건인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1975년) 수사 책임자 경력 등이 말해주듯이 초원복집 사건 이전에 김기춘이 걸어온 길은 “깨끗한 비단옷”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 문제가 되는 대목은 구정물을 뒤집어쓴 피해자인 양 자신을 묘사한 뒷부분이다. 초원복집 사건에서 김기춘이 국민들에게 구정물을 뿌리는 쪽이었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반성한다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이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 이후 “두 개의 법이 제정되거나 바뀌었다”는 얘기도 했다. “하나는 도청을 처벌하는 통신비밀보호법(이 제정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나 선거 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포지티브 선거 운동 시스템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초원복집에서 민주주의 파괴 음모를 꾸민 것이 결과적으로 도청 처벌, 선거 운동의 자유 확대에 기여했다는 해괴한 논리인 셈인데, 이 역시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취하지 않을 태도다.
이러한 발언들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김영삼 지지표가) 100만 표가 더 많아졌다는 말을 들었다”며 자신의 ‘공로’를 은근히 부각한 것과 더불어 김기춘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침략과 가해 사실은 부정하거나 덮으면서 원폭 피해만 과도하게 부각하고, ‘너희가 발전한 건 우리가 지배해준 덕분’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 극우를 떠올리게 만드는 화법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김기춘 표 ‘야구의 세계화’와 선동열·임선동 문제
김기춘 총재 재임 시기에 KBO와 야구계에서 있었던 일을 몇 가지 살펴보자. 취임 직후 김기춘이 강조한 사항 중 하나는 “세계화를 위한 자기반성을 통해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계화를 내세운 것이 눈에 띄는데, 대통령 김영삼이 호주 방문길에 구상했다며 이른바 ‘세계화’를 요란하게 발표하자 김기춘이 그것에 발맞춘 것으로 보인다.
세계화를 위해 김기춘의 KBO는 무엇을 했을까? <동아일보>(1996년 3월 16일 자)에 눈길을 끄는 사례가 나온다. 김기춘 총재가 심판장에게 스트라이크 존 축소를 주문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야만 미국의 메이저 리그처럼 공격 야구가 득세해 한국 야구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투수를 괴롭게 만들라는 것인데, 비정상적 타고투저(打高投低)를 초래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주문이었다. 이른바 ‘세계화’의 실상을 느낄 수 있는 사례 중 하나다.
김기춘이 총재일 때 야구계의 현안 중 하나는 선수들의 해외 진출 문제였다.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선동열 문제가 부각됐다. 선동열은 일본 진출을 원했지만, 해태 타이거스 구단은 보내지 않으려 했다. 2013년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자신이 해태 구단주를 설득해 선동열을 일본으로 보냈고, 그래서 선동열이 지금도 자신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한다고 밝혔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김기춘이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 앞장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임선동 문제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임선동은 박찬호, 고 조성민과 동기로 고교 시절부터 주목받은 투수였다. 김기춘이 총재일 때 임선동은 LG 트윈스 구단과 법정 공방을 벌였다.
발단은 신인 지명권 제도였다. 특정 선수에 대한 지명권을 가진 한 구단만이 그 선수를 고를 수 있고, 그렇게 해서 계약한 선수는 다른 구단 또는 다른 나라에서 선수로 뛸 수 없게 한 제도였다. 현대판 노비 문서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선수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임선동이 반기를 들었다. LG 구단의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 팀(현대 피닉스)과 계약했고, 그와 별개로 일본 진출을 추진했다. 일본 구단도 임선동 영입에 적극적이었다. LG 구단은 강하게 제동을 걸었다. 그러면서 법정 공방으로 이어진 것이다.
김기춘은 LG 구단에 힘을 실었다. 1995년 11월 일본야구기구 총재를 만나 ‘한국 구단의 지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프로 야구단이 자체 합의한 지명권 제도는 존재할 수 없는 권리’라며 거듭 임선동의 손을 들어줬다. 프로 야구 규약에 명시된 지명권 제도를 근거로 헌법에 규정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기춘 총재의 “수모”라는 지적이 나왔다. 김기춘은 “법원의 결정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라며 불만을 표했다. KBO는 법원 판단이 나온 후에도 임선동의 일본 진출을 사실상 막았다. 일본야구기구도 ‘김기춘 총재와 합의한 사항을 준수해야 한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국 임선동은 일본 진출 시도를 접고 LG에 입단해야 했다.
초원복집 사건 주역이 법학 강의?
임선동 문제 등으로 야구계가 시끌시끌했던 1995년 하반기와 1996년 상반기에 사실 김기춘은 그쪽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KBO 일 자체를 등한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향후 행보를 정하는 데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1995년 가을 이후 김기춘은 두 가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하나는 대학원 강의다. 김기춘은 그해 2학기에 한양대 법학과 겸임 교수 자격으로 대학원생들에게 매주 ‘범죄 원인론’을 강의하게 된다. 검찰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해달라고 학교 측에서 제의해 이뤄진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른 건 차치한다 하더라도, 초원복집 사건이 난 지 3년도 안 지난 때였다. 김기춘이 초원복집에서 어떤 음모를 꾸몄는지, 법 기술자로서 어떤 식으로 법망을 빠져나왔는지 많은 사람이 생생하게 기억하던 시점이다. 그런 김기춘에게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기대하면서 법학 강의를 요청한 것일까?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에게 적합한 강의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강의 아니었을까? 승부 조작 범죄에 가담한 프로 스포츠 관계자 중 일부가 속죄의 의미로 승부 조작의 위험성을 알리는 공개 강연을 하는 것처럼.
대통령 친척 3선 의원 제치고 금배지 달다
다른 하나는 KBO 총재 이후 맡을 자리와 관련된 것이다. 김기춘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학원 강의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1995년 9~12월에 김기춘은 차기 안기부장 또는 청와대 비서실장 후보로 거론됐고, 총선을 앞둔 여당의 영입 대상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결국 총선 출마로 가닥이 잡혔다. 염두에 둔 지역구는 고향인 거제였다. 여당 후보로 나서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았다. 3선의 현역 의원인 김봉조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봉조는 김영삼의 친척(집안 아저씨뻘)일 뿐 아니라, 1970년대부터 김영삼과 함께하며 상도동 진영에서 한자리를 차지해온 사람이었다.
김봉조와 김기춘이 맞붙은 거제는 신한국당(민자당의 후신)에서 공천 경합이 치열한 곳 중 하나로 꼽혔다. 신한국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지 않고 청와대에 두 사람을 복수 추천했다. 1996년 2월 김영삼은 김기춘을 낙점했다.
1995년 6·27 지방 선거에서 경남도지사 후보로 나서라는 요구를 김봉조가 거절한 후 청와대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영삼과 맺은 오랜 인연, 특별한 관계를 고려할 때 설마 공천을 못 받겠느냐고 김봉조 쪽에서는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기춘이 낙점되자, 김봉조 쪽만이 아니라 여당 안팎에서 놀라운 일로 받아들였다.
김기춘을 낙점한 것은 김영삼이 김기춘을 얼마나 신임하며 챙겼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또한 김영삼이 1995년에 표방한 역사 바로 세우기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공천 사례 중 하나라는 지적을 받았다. 1996년 4·11총선에서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그러나 김기춘은 김영삼의 고향이기도 한 거제에서 여유 있게 과반을 득표하며 금배지를 달았다.
두 달 후인 6월 8일 이임식을 끝으로 김기춘은 1년 4개월 만에 KBO를 떠났다. 전임 총재의 잔여 임기도 마치지 않은 중도 하차였다. 그에 앞서 김기춘은 그해 1월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라도 총재직을 계속 맡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기춘이 여당 후보로 결정된 순간 KBO를 떠나는 건 시간문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조적으로 또 다른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게 돼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생리에 어두울 수 없는 김기춘이 그것을 몰랐을까?
후임 총재 내정자는 김영삼 정권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홍재형이었다.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야구와 무관한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였다. 홍재형은 4·11총선에서 김영삼의 권유로 청주에 출마했다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바람에 휘말려 떨어졌다. 그것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고자 청와대에서 홍재형을 KBO 총재로 보낸 것으로 보도됐다.
“KBO가 실업자 구제소인가.”
야구계에서 다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반발은 묵살됐다. 구단주들은 정권에서 지명한 홍재형을 총재로 추대했다. 구단주들의 이런 행태는 선수들에 대한 태도와는 천양지차였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문제도 이를 잘 보여준다.
김기춘 OK, 최동원 NO? 한국 야구 잔혹사
1988년 선수협 결성이 추진됐다.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김용철, 삼성 라이온스의 김시진 등이 앞장섰다. 최동원은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봤다. 구단들은 강경하게 탄압했다. 집요한 와해 공작 끝에 선수협 출범을 무산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결성에 앞장선 선수들을 하루아침에 다른 팀으로 쫓아냈다(최동원·김용철 등은 삼성으로, 김시진 등은 롯데로).
보복당한 선수들 중에서도 최동원 사례는 한국 야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최동원은 에이스의 대명사였다. 많은 사람이 최동원에게 매료됐다. 탁월한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혹사를 감수하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최동원은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야구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론 자유를 위해 <부산일보> 구성원들이 파업을 하자, 최동원은 현장에 찾아가 격려금을 전했다.
선수협 결성에 앞장섰다가 강제 트레이드된 최동원은 1990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식조차 없는 쓸쓸한 퇴장이었다. 지도자로 그라운드에 다시 설 길을 찾기도 어려웠다. 선수협 문제로 구단들에 단단히 찍혔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서 최동원은 야구 이외 분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991년에는 지방 선거에 출마했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민자당의 영입 제의를 거절하고, 3당 합당에 반대한 ‘꼬마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했다. 그 후에는 여러 방송에 출연했다. TV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그라운드에 설 길이 있었어도 최동원이 그렇게 했을까? 2001년에야 지도자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쫓겨난 고향 팀 롯데가 아닌 한화 이글스 소속이었다.
최동원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줄줄이 내려온 김기춘 같은 낙하산 총재들, 그러한 낙하산 인사들을 두말없이 추대한 구단주들의 행태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세부 사항은 다르겠지만, 30년이 넘는 프로 야구 역사에서 그와 유사한 시련을 겪은 야구인이 최동원 한 사람뿐이라고 볼 수도 없다. 한국 야구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최동원 같은 야구인이었을까, 낙하산 총재들과 구단주들이었을까? 답은 자명해 보인다.
김기춘과 최동원은 직접적인 접점을 찾기 어렵지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경남고 동문이다. 최동원과 선수협 이야기에도 경남고 동문이 등장한다. 김기춘과 상반된 길을 걸어온 또 다른 고교 선배 문재인 변호사다. 2012년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 고문은 “고 최동원 선수가 선수협의회를 만들 때 많은 상담(필자 : 법률 자문)을 했다”고 밝혔다.
KBO 홈페이지에 역대 총재 자료가 없는 이유
김기춘이 떠난 후 KBO 총재 상황을 더 살펴보자.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위기를 맞은 이듬해(1998년), 홍재형 KBO 총재는 검찰로부터 출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부총리 시절 종합금융사(종금사) 무더기 인허가 과정에 개입한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무렵, 김기춘의 전임 총재인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구속됐다. 초원복집 모임 참석자 박일룡과 함께 1997년 대선 당시 북풍 조작의 핵심 실세였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구속 전 권영해는 문구용 커터 칼날로 자해해 눈길을 끌었다.) 김기춘, 이상훈을 포함하면 이때까지 KBO 총재를 맡았던 7명 중 4명이 사법 처리되거나 수사 대상이 된 것이다. 야구계에서는 “언제까지 이런 인물들을 웃어른으로 모셔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탄식이 나왔다.
씁쓸한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권 교체 후 처음으로 임명된 정치인 총재 정대철(홍재형의 후임)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며 4개월도 못 채우고 물러났다. 후임 총재로 정치권 낙하산이 아니라 구단들이 추대한 박용오 두산 그룹 회장이 취임했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선수협 설립 움직임이 다시 나타나자, 박용오는 재벌 회장답게 선수협 설립에 제동을 걸었다(정부의 개입을 거쳐 선수협은 출범했다). 2005년 두산 그룹 ‘형제의 난’이 일어나면서 총수 일가 7남매 중 박용오 등 4명은 횡령·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박용오·박용성 형제에게는 1심에서 나란히 징역 3년, 집행 유예 5년이 선고됐다. 재벌 회장들에 대한 정찰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른바 ‘3·5 법칙’(징역 3년, 집행 유예 5년)이 이때도 적용된 것이다.
정치인 출신 신상우 총재를 거쳐 2009년에 다시 구단들의 추대로 명지학원 이사장 출신 유영구가 KBO 총재에 취임했다. 2년 후 유영구 총재는 사학 비리 혐의로 구속되며 물러났다.
KBO 총재들의 이와 같은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지도층을 자임하는 인사들의 민낯이자 그들이 저지르는 비리의 축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KBO 홈페이지에서 신기하게도 역대 총재에 관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이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덧붙이면, 김기춘과 KBO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양해영이다. KBO 공채 1기 출신인 양해영은 김기춘이 총재일 때 비서였다. 김기춘이 1996년 금배지를 달자, 그 보좌관으로 일하다 KBO에 복귀했다. 2017년 말까지 6년간 KBO 사무총장이었던 양해영은 이런저런 의혹 및 논란에 휩싸이며 “KBO 적폐의 중심”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KBO 총재 시기와 이미지 세탁
초원복집 사건 후 김기춘이 다시 권력 중심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함께 이미지 세탁이 필요했다. 초원복집 사건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 김기춘의 무시무시한 본모습을 희미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가리는 것, 이미지 세탁의 본질은 바로 그것이었다.
KBO 총재는 그러한 작업에 적합한 자리였다. 프로 야구를 더 활성화하는 데 앞장선다는 이미지를 통해,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이라는 실체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본모습을 희미하게 만드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었다.
KBO 총재 시기에 맡은 대학원 법학 강의도 이미지 세탁 작업에 힘을 싣는 요소였다. 민주주의 파괴 음모를 꾸민 법 기술자라는 본모습은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에 오랜 현장 경험을 갖춘 중립적인 법 전문가인 듯한 이미지를 채워 넣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KBO 총재를 맡음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이미지 세탁만이 아니었다. KBO 총재는 야구를 매개로 재벌 총수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KBO 총재 시기에 재벌 총수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KBO를 떠난 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임선동 문제를 되짚어보자. 프로 야구 규약에 명시된 지명권 제도가 헌법에 규정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을 법 전문가 김기춘이 과연 법원 판단 전에는 파악하지 못했을까? 헌법에 충실할 경우, ‘몸값이 지나치게 상승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이유로 지명권 제도 사수를 주장한 구단 측, 즉 재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김기춘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KBO 총재 시기에 이미지 세탁 작업을 거친 김기춘은 야구를 징검다리 삼아 권력 중심부로 다시 나아갔다.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은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권력에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