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국제공항 청소노동자가 ‘하이(Hi)’라고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받은 건 루렌도 가족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지난 8일 인천공항 제1여객터미널 4층 면세품 수령장 앞에서 발생한 일이다. 버려진 비닐을 치우던 여성은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영화 <터미널> 속 장면이 연출된 순간이었다. 언어가 달라 대화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 여성은 루렌도 가족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말 대신 표정과 몸짓으로 대화했다. 공항 노숙이 200일을 넘어가자 루렌도 가족을 몰래 돕는 직원들이 늘어났다고 루렌도 씨의 부인 바체테 씨는 말했다.
“바체테 씨, 놀라워요. 저 청소하시는 분이랑 친구가 된 거예요?”
“네. 저희 담요를 가끔 빨아주세요. 참 고마운 분이에요.”
실제로 인천공항 청소노동자들은 루렌도 가족에게 쓰지 않는 물건을 주거나 먹을 것을 나눠준다고 바체테 씨는 말했다. 여행객들이 두고 간 케리어를 가져와 “쓸 만하다”면서 “필요하면 쓰라”고 몸으로 알려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씻는 환경도 전보다 나아졌다고 했다. 인천공항의 배려로 현재 루렌도 가족들은 샤워실을 무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공항 노숙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먹고 자는 일은 여전히 전쟁과 같다. 취재기자가 루렌도 가족을 만나러 가겠다고 말하자, 루렌도 가족을 돕고 있는 이주민단체 ‘난민과 함께 공동행동’은 배달을 부탁했다. 끼니 해결이 아직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루렌도 가족 아이들의 아침이 될 전지분유와 시리얼을 대신 전달해달라고 말했다.
전지분유는 우유를 가루 형태로 만든 것이다. 전지분유를 물에 넣으면 우유가 된다. 인천공항의 액체물 반입 기준으로 우유를 액체상태로 들고 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유 대신 전지분유를 들고 가는 것이다.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는 액체는 1L까지다. 그것도 100mL씩 나눠 담아야 가능하다.
루렌도 씨가 기자에게 따로 부탁한 것은 치약이었다. 치약도 액체물로 분류된다. 치약 역시 1리터 이상 들고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용량의 제한을 받지 않기 위해 여객터미널 내에 있는 약국에서 치약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그 일은 공항 물가를 체감하기 충분했다. 그 약국에서 유일하게 파는 치약 1개 가격은 1만 원이었다.
배달 물품을 안고 도착한 루렌도 가족의 임시거처는 그대로였다. 수개월 전 모습을 박제한 듯했다. 서늘한 에어컨 바람과 여행객으로 북적이는 모습 모두 변함 없었다. 취재진이 도착했을 때 루렌도 가족은 식사 중이었다. 수북이 쌓인 케리어 앞에 다 같이 앉아서 하는 식사는 음식을 즐기는 것보다 끼니를 때우는 것에 가까웠다.
“그 사이에 케리어가 더 늘어난 것 같아요.”
“저희가 한국에 올 때 케리어가 3개였는데, 이제 30개예요. 선물 받은 옷과 책이 많아요.”
200일 넘게 공항 노숙.. “수면제 없이 못 자”
루렌도 가족은 오랜 노숙 생활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루렌도 씨와 아내 바체테 씨는 무료함을 휴대전화 게임으로 달랜다. 그렇다고 아이들에 대한 주의는 잃는 건 아니다. 아이들이 주변을 소란스럽게 하면 조용히 타일렀다.
첫째 아들 레마(9)는 노트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주로 유튜브로 애니메이션을 본다. 소파에 반쯤 기대 노트북 속 영상을 보는 게 일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셋째 아들 실로(8)가 형과 함께하는 경우도 있지만, 노트북 앞을 가장 오래 지키는 사람은 레마다. 고고학자가 꿈인 아이지만, 공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영상을 보는 일뿐이다.
둘째 딸 로데(8)는 아이들 중 가장 활발해 보였다. 로데는 후원자들로부터 받은 장난감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다가 취재진에게 장난을 걸었다. 공항 라운지 앞의 공간을 마당처럼 뛰어다니기도 했다. 사귈 수 있는 또래 친구가 없어서인지 후원자나 취재진이 나타나면 유독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다.
셋째 아들 실로는 엄마에게 가장 잔소리를 많이 듣는 아이다. 공항 노숙이 길어지면서 엄마 아빠가 무엇을 물어도 잘 대답하지 않고, 형제들과의 갈등이 늘었다. 막내 아들 그라샤(6)는 엄마 옆에 주로 머문다. 그라샤는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자주 보챘다.
오랜 공항 생활은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우유와 시리얼 위주로 먹다 보니 소화기관에 이상이 생겼다. 셋째 실로의 증세가 가장 심하다. 야채와 과일을 자주 먹지 못해 변비에 걸렸다. 루렌도 가족의 오랜 후원자 최윤도 씨와 사단법인 ‘두루’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지만, 공항 생활이 계속되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된다.
병원 신세를 진 사람은 더 있다. 바체테 씨는 며칠 전 치과를 다녀왔다. 이전에는 복통 때문에 내과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미 혈압약과 소화제, 수면제를 먹지만 치통 때문에 약이 하나 추가됐다. 첫째 레마는 팔이 다치는 바람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소파 몇 개를 붙여서 생활하던 중 그 사이에 팔이 끼어 사고를 당했다.
루렌도 가족을 진료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최규진 인권위원장은 “루렌도 가족의 현실은 사실상 재난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루렌도 씨는 고혈압이 심각한 수준”이고 “아내 바체테 씨는 녹내장이 심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바체테 씨는 “위염이 심각해서 위에 천공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부모 두 사람의 상태는 뇌졸중이나 실명, 장천공 등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나쁩니다. 만약 이런 일이 발생하면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도 국제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약 없는 루렌도 부부의 일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청할 수 있다. 소음 때문에 거의 매 시간 깼던 루렌도 부부는 수면제를 먹기 시작한 후부터 숙면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말했다. 약이 없으면 수면 장애 때문에 종일 몽롱한 상태로 보내야 한다.
‘난민 혐오’ 폭언 피해.. 아이들, 무전기 소리에 놀라기도
“그때 그 일 때문에 아이들이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무전기 소리만 나도 아이들이 벌벌 떨고 그랬어요.”
약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혐오로 인한 피해다. 기자가 “최근 겪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루렌도 부부는 지난 5월 어떤 한국인에게 폭언을 당한 것이라고 답했다. 한 공항 관계자가 가족에게 욕설을 내뱉어 마찰을 일었다고 한다. 루렌도 가족을 향해 그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Go back to your country!)”라고 영어로 소리쳤다고 루렌도 씨가 말했다.
“제가 무슨 일인지 그에게 물었는데 답을 안 해줬어요. 욕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어요. 아이들은 겁에 질렸고요.”
한 번 벌어진 일이 아니다. 처음엔 루렌도 씨에게만 욕설을 퍼부었는데, 그 후 세 번은 아이들을 상대로 욕을 했다고 한다. 그 한국인은 휴대전화로 가족들 촬영을 시도하고 욕설도 멈추지 않아 루렌도 씨는 결국 공항 보안요원을 불렀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보안요원은 한국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식의 경고를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보안요원은 우리가 머무는 곳 위에 CCTV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공개된 장소에서 자야 하잖아요. (우리는 혐오하는 사람이) 밤에 급습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해코지 당할까봐 두려웠어요.”
그 일을 겪은 뒤 루렌도 가족의 아이들은 혼자 화장실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보안요원의 무전기에서 나는 신호음마저 아이들이 두려워 한다고 루렌도 씨는 말했다. 루렌도 가족을 돕는 최윤도 씨도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를 체감했다고 한다.
“확실히 아이들이 무전기 소리에 트라우마가 있어요. 저하고 잘 놀다가도 무전기 소리가 나면 눈이 동그래져서 놀라는 게 보여요. 무전기 소리만 나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지니까요.”
실제로 루렌도 씨 아이들은 정신적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다. 아이들과 면담을 하고 온 정신과 전문의는 아이들 정신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다고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한 아이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다른 아이는 스트레스가 누적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루렌도 가족 돕기 운동 중
루렌도 가족의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은 우리나라 못지않게 난민 인정률이 낮다. 작년 초 일본 정부는 난민 인정 심사를 강화했을 정도로 난민 수용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루렌도 가족의 일본어 기사는 그런 환경 속에서 나왔다. 일본 프리랜서 기자 리사 쿠와하라 씨가 우연히 루렌도 가족의 사연을 접하면서 지난 6월 루렌도 가족 이야기가 기사화했다.
리사 씨는 일본인-베트남계 미국인 부부를 통해 루렌도 가족을 알았다. 트란 부부는 인천공항에서 환승을 하다가 루렌도 가족을 알게 됐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트란 부부의 딸 코토와 루렌도 씨 둘째 로데가 친구가 되면서, 이를 계기로 트란 가족은 루렌도 가족의 사정을 주변에 알리기로 했다.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전단지를 돌렸다. 리사 기자가 이 소식을 접한 것도 트란 부부 전단지 때문이다.
“한 가족이 공항에서 5개월 동안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이야기를 기사화하고 싶었어요. 일본 사람들에게 난민에 대한 배경 지식을 알리기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 리사
트란 부부는 다방면으로 루렌도 가족을 도왔다. 프랑스어로 된 책을 구할 수 없는 루렌도 가족을 위해 직접 자료를 출력해서 책으로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교육 관련 콘텐츠가 담긴 테블릿 PC를 다른 후원자를 대신해 전달하기도 했다. 코토는 동갑내기 친구 로데에게 선물을 줬다. 선물을 받은 로데는 다시 코토에게 감사 선물을 건넸다. 일본인 코토와 앙골라인 로데는 그렇게 우정을 쌓았다.
리사 기자의 기사와 트란 부부의 활동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러 일본인은 루렌도 가족을 위해 십시일반 생활비와 생필품을 모았다. 최윤도 씨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에게 받은 것을 루렌도 가족에게 전달하고, 루렌도 가족의 감사 선물을 다시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은 난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지만, 루렌도 가족을 도우려는 일본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트란 부부의 남편 휴이 씨는 베트남 출신의 난민이에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어렵게 이주한 경험이 있어서 루렌도 가족에 대한 감정이 남다른 것 같아요.” – 최윤도
난민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소송 항소심 시작
루렌도 씨가 인천국제공항 출입국사무소를 상대로 낸 난민 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소송 항소심이 19일부터 시작됐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루렌도 가족의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난민 인정심사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가 원고들에게 적절히 안내되는 등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고 판단했다.
루렌도 가족의 변호인단은 첫 항소심 변론기일에서 루렌도 가족이 앙골라에서 처했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엔난민기구에 앙골라의 불안한 국가 상황을 조회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루렌도 가족의 변호인단은 또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통해 난민법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것을 밝힐 예정”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난민 인정심사 불회부 요건과 관련한 내용이 법률에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은 점이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루렌도 측은 외국인청에 심사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외국인청은 1심 때와 마찬가지로 “심사보고서는 내부결재용”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더불어 외국인청은 “난민 인정 회부 심사는 국경수비를 위해 필요한 절차”라는 취지로 말했다.
재판 후 서울고등법원 정문 앞에서는 루렌도 찬반집회가 열렸다. 난민과 함께 공동행동을 비롯한 난민지지 단체들은 “루렌도 가족이 하루빨리 공항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며 루렌도 가족의 체류를 주장했다. 반면 난민대책국민행동를 비롯한 반난민 단체는 “루렌도 가족은 가짜 난민”이라면서 “추방해야 한다”고 맞섰다.
2차 공판은 8월 23일 오전 11시 50분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