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숙이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돌아왔다. 검찰과 사법부가 각자의 문제로 만신창이가 된 지금, 권인숙의 등장은 절묘하다. 그때 사건을 돌아보면서 몰락한 사법부의 오늘을 살펴보고자 한다. 과거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권인숙의 책 <하나의 벽을 넘어서>를 기초로 재구성했다.
순대를 먹으며 책을 읽던 초여름 오후의 자취방은 평화로웠다. 초인종에 이어 굵은 남자 목소리가 심장을 얼게 할 때까지는 말이다.
“여기 자취하는 아가씨 한 명 있죠?”
남자는 밖에서 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는 한 명이 아닌 둘, 형사였다. 이들은 압수수색영장 없이 방을 뒤졌다. 공장 취업을 위해 마련한 위조된 주민등록증은 금방 발각됐다. 권인숙은 부천경찰서로 끌려 갔다. 1986년 6월 4일의 일이다.
“에이, 이거 C급밖에 안 되잖아!”
권인숙이 부천경찰서 4층 대공과에 도착했을 때 숙직중이던 형사는 짜증을 냈다. 권인숙은 A급 운동권도, 한 달 전 인천에서 크게 벌어진 시위 ‘5.3사태’의 주동자도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의류학과를 자퇴하고 공장에 취업하려 공문서를 위조한 인물에 불과했다.
첫날 조사는 5일 새벽 세 시 넘어서 끝났다. 권인숙은 대공과 소파에 누워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C급 권인숙은 “피라미“라고 불렸다.
형사들은 C급 피라미를 살살 다뤘다.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서. 권인숙은 정신없이 맞기만 했지만 정말 ‘살살‘이었다. 다음날 새벽부터 일어난 일에 비하면 말이다.
권인숙은 부천경찰서 형사계 보호실로 끌려 갔다. 남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남자만 우글거리는 보호실에 들어가는 것이 몹시 당혹스럽게 느껴져 다른 곳에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무참하게 거절만 당하고, 나는 엉거주춤 보호실에 들어섰다. 지금 생각하면 여자에 대한 특별 배려를 부탁했던 내 자신의 그날 행동이 가엾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자에 대한 특별 대우가 그 뒷날부터 문 형사에게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가를 생각하면 말이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15쪽에서
“권인숙, 일어나!”
6일 새벽 네 시, 경찰은 보호실의 그녀를 불러냈다. 드디어 그가 등장한다. 입술이 두꺼운 그놈.
“따라와.”
‘그의 인상 하나에 나는 이미 질려 있었다. 태어나서 그런 살기 있는 인상을 직접 본 기억이 없었다. 그를 따라 층계를 내려 갔다. 어제 와보았던 수사 계장실(5호실)로 들어갔다. 주변은 컴컴했다. 다만 우리 둘만 있을 뿐이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19쪽에서
“너 양승조 알지?”
“모릅니다!”
“너 그럼 5.3사태 관련자 중 누구 알아?”
“아무도 모릅니다.”
알길 없는 권인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일어나서 자기 앞에 서라고 했다. 웃저고리를 벗으라고 했다. 남방도 벗으라고 했다. 하라는 대로 하고 흰색 반팔 면 티셔츠만을 입은 채로 다시 섰다. 그는 서슴없이 나의 티셔츠와 러닝 셔츠와 브래지어를 들추었다. 나의 몸은 너무 놀라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러나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19쪽에서
“너 처녀냐?”
형사 문귀동은 추행을 하면서 견딜 수 없는 모욕스런 질문을 했다. 참을 수 없던 권인숙이 사건과 별 상관 없는 사람 이름을 말하자 그는 몹쓸짓을 멈췄다.
‘보호실로 돌아왔다. 그때가 새벽 여섯 시쯤이었다. 모두들 자고 있었다. 담요를 뒤집어쓴 남자들 사이를 지나 여자 보호실로 돌아왔다. 쪼그리고 앉았다. 머리 속에서 휑하니 바람이 불었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21쪽에서
다음 날인 6월 7일 밤 9시, 문귀동이 다시 권인숙을 불렀다. 그는 “토요일인데 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나왔다”고 화를 내면서 그의 조사실 옆방인 1호실로 권인숙을 끌고 갔다. 문귀동은 불을 켜지 않은 채 권인숙에게 바닥에 꿇어앉으라고 했다.
문귀동은 다시 욕설을 하며 다른 사람의 행방과 거처를 물었다. 권인숙은 그가 원하는 답을 못했다. 낯선 형사 두 명이 1호실로 들어왔다.
‘한 형사가 나의 두 팔을 뒤로 돌려 수박을 채웠다. 그러자 다른 형사가 무릎 사이에 봉을 끼웠다. 그들은 서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논도 하지 않으면서도 호흡이 척척 맞았다. 그리고 같은 형태의 봉으로 넙적다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몹시 아팠다.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37쪽에서
한 형사가 불을 켜고 수배자들의 사진을 권인숙 앞에 내밀었다. 아는 사람을 찾으라며 사진을 한 장씩 넘겼다. 문귀동이 다시 “너 정말 OO이 집 몰라?”라고 물었다.
‘내가 정말 모른다고 대답하자, 문(귀동)은 따라오라고 하면서 그 방을 나섰다. 수갑을 찬 채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그의 조사실인 2호실이었다. 이 방에도 불이 꺼져 있었고, 바깥의 외등으로 사람을 간신히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39쪽.
“너 아버지가 뭐 한다고 그랬지?”
“식당을 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권인숙은 그의 질문이 “나의 아버지가 누구냐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일의 종류와 정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암시”라는 걸 몰랐다.
문귀동은 비시시 웃었다. 바깥 외등의 불빛으로도 그 미소가 보였다. 문귀동은 어제 새벽처럼, 아니 그보다 심하게 성고문을 했다.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이토록 철저하게 모욕당하다니.. 차라리 그가 날 죽여 주는 것이 훨씬 깨끗하고 고마울 것 같았다. (중략)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짓거리를 했다. 나는 이미 정신을 갖고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41쪽에서.
고문은 다양했다. 문귀동은 담배에 불을 붙여 비흡연자인 권인숙에게 강제로 빨게 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억지로 담배를 입에 넣었다. 권인숙은 밤 11시 넘어 문귀동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보호실이 아닌 유치장으로 향했다.
‘6월 초, 이미 완연한 초여름의 날씨였는데도 나는 몹시 추웠다. 힘을 내어 곰팡내가 풀풀 나는 담요 전부를 내 몸 하나만 깔고 덮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두껍게 접었다. 그 안에 파고 들어가 베개로 접은 담요에 고개를 묻었다. 여전히 추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만 문 형사의 두터운 입술과 풀어 헤친 바지 앞만이 쉴 사이 없이 아른거렸다. ‘살아야 했는가. 내가 이제 살아야 하는가..!’ – <하나의 벽을 넘어서> 43쪽에서.
권인숙은 6월 16일에 인천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됐다. 간단히 조사를 받고 인천소년교도소로 향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양심수들과 함께 지내는 교도소 생활은 경찰서보다 나았다. 동료 수감자에게 성고문 당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저는 아주 심하게 당했어요. 성적으로요. 옷을 벗기고 만지고..”
수감자들은 권인숙의 말을 이해 못하는 눈치였다.
‘잊자,
모든 것을 잊자.‘
권인숙은 스스로에게 망각을 강요했다. 어느 날, 고교 1학년 때 다녔던 학원 교실이 나오는 꿈을 꿨다.
‘아이들과 떠들며 학원 강사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때 들어온 선생이 문귀동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다만 몸만 뒤틀릴 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165쪽에서.
침묵 하면서 기억을 지우려 애쓸수록 문귀동의 존재는 커지고, 자기는 쪼그라드는 듯했다. 다른 피해자도 계속 나올 게 뻔했다. 권인숙은 자신이 겪은 모든 걸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선임한 변호사가 교도소로 접견을 왔다.
권인숙은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당했습니다, 가능하면 고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놀란 변호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세상은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권양 부천서 성고문’은 빠르게 세상으로 퍼졌다. 검찰, 경찰도 숨가쁘게 움직였다. 인천지검 남충현 검사가 권인숙을 불렀다.
“부천서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누구에게 당했다는 거야?”
‘그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저항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열심히 내가 당한 고문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한두 시간 동안 검사의 질문에 답하면서, 울음 범벅이 된 채로 나는 성고문 당한 정황을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172쪽에서.
남 검사는 권인숙의 말을 안 믿는 눈치였다. 권인숙은“나 혼자서라도 밝히고야 말겠다”고 소리지르고 남 검사 방에서 나왔다.
7월 2일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는 조영래, 홍성우 변호사가 접견을 왔다. 권인숙은 7월 3일 고소장을 제출했다. 사태는 일파만파 커졌다. 법무부, 내무부, 안기부가 숨가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김성기 법무부 장관이 7월 4일 아침 김경회 인천지검 검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권인숙 사건 왜 빨리 수사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느냐 하시면서 신경질적인 전화였다. (중략) 장관은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빨리 내사에 착수하라고 하였다.’ 김경회, <나 이제 자유인 되어> 150~151쪽에서.
전화를 끊은 지 약 두 시간 뒤에 유길종 경찰국장과 유두현 수사과장이 김 검사장을 찾아왔다.
“자체 조사를 해봤는데요. 성고문은 터무니없는 허위 사실입니다. 권인숙을 무고로 맞고소 하는 것이 상부의 지시입니다.”
그날 낮 12시께 경찰은 고소장을 접수했다. 김 검사장은 “간부들과 검사들을 총동원하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데 전력을 쏟기로 결심”했다. 조영래 등 변호사 9명은 7월 5일 고발장을 냈다.
‘처음에 인천지검은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사건을 수사했다. 검찰은 경찰서 유치장과 인천교도소에서 권인숙으로부터 성고문 사실을 들은 수감자들과 경찰관 등 43명을 소환하여 진술을 받았다.’ – 한홍구, <사법부> 248쪽에서
고소장을 접수한 권인숙은 남충현 검사에게 다시 불려갔다. 조서 작성 중, 명예훼손으로 권인숙을 고소한 문귀동의 고소장이 남 검사에게 전달됐다. 잠시 뒤 문귀동이 당당하게 남 검사 방으로 들어왔다.
“자, 권양은 자네가 성고문을 했다고 하고, 자네는 아니라고 하니까 둘이 한 번 얘기해 보라고.”
“저는 성고문 한 사실이 없습니다.”
“아 그런데 왜 권양은 자네를 지목했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만 6월 6일과 7일, 7시에서 9시 45분까지 이흥기와 박경천이 입회한 가운데 조사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그의 거짓말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참으로 얼뜨게도 “이 놈이, 이놈이” 중엉거릴 뿐이었다. 나의 몸에 경련이 일고 손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교도관에게 손 좀 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하나의 벽을 넘어서> 188쪽에서.
안기부 인천분실장은 “권인숙이 급진 좌경 사상에 물든 나머지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마저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7월 11일, 안기부 확대 부서장 회의에서 장세동 부장은 “현 상태에서는 공권력 마비를 위한 공산 세력의 조작이다. 사실대로 수사하여 진위를 가려야 한다. 수사 결과에 따른 책임을 강구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인천지검은 진실 규명에 자신감을 보였다. 권인숙도 ‘검사실에 간이 침대까지 갖다 놓고 밤새워 일하는 검사들에게 신뢰감이 싹트기까지 하였다‘고 책에 적었다. 김경회 인천지검 검사장은 7월 15일 서동권 검찰총장실로 불려갔다.
‘총장은 안기부장 등과 대책회의를 하고 왔다며, 안기부에서는 발표문과 대통령에 대한 보고 문서 등에 성 고문의 ‘성’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단다.’ – <나 이제 자유인 되어> 156쪽에서.
7월 16일 오후 4시, 인천지검은 자신들이 수사한 결과를 정반대로 발표했다. 성고문이 있었다는 권인숙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고, 단지 문귀동이 조사 중 디셔츠를 입은 권인숙의 가슴 부위를 쥐어박은 사실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검찰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는 이미 파면처분을 받았고 지난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여 성실하게 근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하여 문귀동을 기소유예할 방침입니다.”
‘세상이 멍하게 느껴졌다. 그 멍한 가운데서도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이 곳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구나. 이것이 내가 나서 자란 땅의 윤리구나. 그동안 수사를 하면서 매듭이 풀리어 간다고 신나하고, 진리의 수호자가 이곳저곳에 보이는 듯 미더워했던 자신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바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 <하나의 벽을 넘어서> 207쪽에서
법무부 장관은 격려금 200만 원을 인천지검으로 보냈다. 간부들에게 고루 나눠주고, 8월 19일까지 사건을 종결하라는 지시와 함께. 이렇게 검찰은 성고문 사건의 공범자가 됐다.
이제 권인숙이 기댈 곳은 사법부뿐이다. 안기부가 “성고문의 ‘성’자도 나오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전두환 정권에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법원은 인권의 최후 보루로서 법과 양심에 따라 정권의 치명적 문제를 처리했을까?
조영래 등 변호사 166명은 1986년 9월 1일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불복하여 그 불기소처분의 당부를 가려 달라고 직접 법원에 신청하는 제도)을 했다. 서울고법은 문귀동의 성고문 사실 대부분을 인정했다.
“경찰관이 형사피의자를 위협하여 특히 여성으로서의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여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위와같은 인권침해는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로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엄히 응징하여야 함은 마땅하다 할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법원은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한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 ’재정신청 기각’이었다.서울고법 형사3부(재판장 이철환)는 검찰의 문귀동 기소유예 처분이 정당하다는 논거 중 하나로 이렇게 말했다.
“피의자 문귀동은 직무에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수사를 하다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으로 이미 파면되고 비등한 여론과 피의사실로 인하여 형벌 못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받았고..”
권인숙은 “딛고 있는 땅의 일부가 계속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조영래 변호사는“사법부의 몰락을 본다”며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탄식했다.
성고문을 자행한 문귀동은 기소유예로 자유의 몸이 됐고, 권인숙은 공문서 위조 혐의로 실형 1년 6월을 선고 받았다. 1986년 12월 4일의 일이다. 법원은 이렇게 성고문 사건에서 최후의 공범이 됐다. (문귀동은 민주화 이후 1988년에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은 어떻게든 권인숙을 묶어둬야 했다. 어쩌면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재판에서 변호인들, 특히 조영래 변호사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중략) 국정원 과거사위가 확인한 바로는 당시 안기부 인천분실 대공과장이 재판부에 권인숙이 실형을 언도받도록 강력히 조정했음을 입증하는 보고서가 국정원에 남아 있다.’ – 한홍구, <사법부> 355~356쪽에서.
책 내용대로 “이미 결론이 난 재판”이었다. 안기부는 권인숙 재판을 배후에서 ‘조정’했다. 사법부는 법과 양심이 아니라, 안기부의 뜻에 따라 심판했다.
온갖 폭언, 폭행을 당한 권인숙은 양심과 자기 존엄성을 지키고 다른 피해자를 막으려 힘들게 싸웠다. 그에 비하면 속칭 수사기관에 끌려가 ‘뒷통수 한 대 맞은 적 없는’ 사법부의 법관들은 너무 쉽게 굴복한 셈이다.
권인숙의 아픔을 외면하고 문귀동의 “정신적 고통”을 걱정했던 이철환 판사. 그는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1등’을 한 번 차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93년 9월 8일 <한겨레>에는 ‘정치판사, 부동산에도 일가견’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철환 인천지법원장(당시 서울고법 형사3부 부장판사)도 ‘투기 혐의’를 받고 있다. 79억5천만원을 등록해 사법부에서 제1의 재력가로 나타난 이 원장은..”
당시 공직자 재산공개에서 이철환 판사는 79억5000만 원을 등록, 사법부에서 1위 부자였다. 권인숙의 재정신청 기각 이후, 그는 인천에서 많은 부동산을 매입했다. 그는 광주고등법원장을 끝으로 법원을 떠났다.
백 번 양보해서 그때 그 시절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시민들이 쟁취한 민주화 덕분에 배후에서 판결을 ‘조정’하던 안기부–정앙정보부는 이제 사라졌다. 사법부가 문귀동을 선처(?)한 지 약 30년, 오늘날의 사법부는 과연 어떨까. 이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조영래 변호사의 그때 그 탄식처럼 많은 사람들은 다시 사법부의 몰락을 본다. 몇 가지만 살펴보자.
문귀동이 전두환에게 그랬던 것처럼, ‘국정원장 원세훈’은 박근혜 정부의 치명적 아킬레스건이었다. “선거개입의 ‘선’자도 나오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는 권력기관이 없는데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 수뇌부는 원세훈 재판을 두고 청와대와 적극적으로 교감을 나눴다. 애써 정보기관이 조정하지 않아도, 사법부가 알아서 권력자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법원 수뇌부는 과거 자신들을 ‘조정’했던 안기부처럼 활동하기도 했다. 이들은 내부 구성원을 감시하면서 블랙리스트 만들었다. 이 문제가 수면위로 드러나자 진상조사를 맡은 전현직 고위 법관들은“판사 뒷조사 문건은 없다”고 밝혔다. “자제 조사 결과 성고문은 없었다”고 억지를 부린 그때 그 경찰–검찰과 별 비슷한 모습이다.
무엇보다 법원이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동원해 온정을 베푼 문귀동, 그 이름 자리에 재벌가 누구의 이름을 넣어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게 오늘날 사법부의 현실이다. “한국의 법관은 오직 법과 양심과 삼성에 따라 심판한다”는 비아냥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권력에 굴복해 성고문 사건 수사결과를 왜곡해 발표한 김경회 전 검사장. 그나마 그는 자신의 책에 “수챗구멍에 목을 묻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처지”라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막는 격이니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고백했다.
판결로 권인숙을 고문했던 사법부 구성원 중 저 수준으로라도 고백이나 반성을 한 사람이나 흔적이 있을까? 국정원 사거사위에서 활동한 뒤 <사법부>를 쓴 한홍구 교수는 “아쉽게도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1986년 11월 21일, 권인숙은 1심 재판 최후진술을 했다. 그 한 대목은 이렇다.
“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아주머니 할머니 아가씨들을 볼 때 판검사들은 그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판검사들은 그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그들 가정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빽 있는 자는 살인을 해도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운동권 학생들의 주식입 논리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경험하고 체득한 논리입니다.
한 인간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을 매일같이 감방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판검사에게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운명을 좌우하는 판검사들의 저 더러운 위력을 보면서 낮은 자리에 앉아 허름하게 죄수복을 입은 나의 처지가 훨씬 떳떳한, 마음 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법부는 ‘돌아온 권인숙’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오늘날 자신들의 위력이 누구에게 강하고 약한지 돌아보기나 할까?
아, 성고문 공범자 하나를 빠트렸다. 조영래 변호사의 글을 묶은 책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언론은 이 사건에서 성고문의 진상을 은폐–왜곡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내용이나, (중략) 공안당국의 분석내용이란 것은 액면 그대로 대문작만하게 보도하였으나, 권양 측의 주장 내용에 대하여는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중략)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제도언론은 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까?” – 성고문사건 변론 요지에서
조영래 변호사의 언론 ‘받아쓰기‘ 질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98년 2월 20일 여러 언론에 이철환 판사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또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썼는지 내용이 똑같다.
“이철환 대전고법원장 재판 빈틈 없어.. 세심한 관리자형.
훤칠한 용모에 소탈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후배 법관들을 격의 없이 대해 신망이 두텁다.”
저런 보도자료를 낸 법원이나, 이걸 또 받아쓰기 한 언론이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최근 법조출입기자단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판결문‘을 공개한 <오마이뉴스>에 대해 ‘출입정지 1년‘이라는 중징계를 결정했다.
정말이지 부끄러움이란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닌가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