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대개 출입처로 출근한다. 청와대, 국회, 민간 기업 기자실까지 다양하다. 출입처 제도의 본래 목적은 가장 가까이에서 권력의 부패와 전횡을 감시하기 위함이다.
한국 언론사들이 학익진의 전술로 곳곳에 기자들을 권력의 감시견으로 파견시킨 지 벌써 반세기가 넘었다. 부작용은 컸다. 기자들은 점차 받아쓰기에 익숙해졌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출입처 취재원을 만나면 기자들은 “어디 기사 거리 없슈”하며 구걸하듯 말한다.
보도자료는 취재의 시작점이 되기 일쑤였고, 출입처의 말을 확인 없이 보도하는 일도 잦았다. 기자와 기자 기자와 출입처 사이의 카르텔도 공고해졌다.
오늘의 글은, 질문하지 않고 받아쓰기에 익숙해진 한국 기자들에 대한 얘기다.
‘각본‘ 기자회견 속 ‘조연‘ 기자들
장래희망 칸에 ‘기자’를 적는 아이가 요즘 있을까? 있긴 해도 아마 소수일 듯하다. 근래 텔레비전 속 기자들 모습은 부끄러워 혀를 내두르기 충분하다. 언론인의 본분과 거리가 멀다.
기본 중의 기본 ‘질문’을 안 한다
인터뷰 대상의 직급이 높을수록 이는 더 심해진다. 경찰서 말단 순경에게는 빽 소리치며 질문할 수 있어도, 대통령에게는 그러질 못한다. 권력에 움츠러들어 있다.이것이 한국 기자들의 맨 얼굴이다.
2010년 G20 정상회담 일화가 대표적 예다. 당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주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주고 싶다’ 제안했지만, 어느 기자도 손을 들지 않았다. 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민망함을 걷어내 주지 못했다.
‘한국어로 질문해도 좋다’ 덧붙여 말했음에도 장내는 고요했다. ENG 카메라만 외롭게 관중을 훑었다. 결국 중국 기자가 손을 들었다.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아시아를 대표해 질문해도 되겠냐’며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이 장면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자주 연출됐다. 대통령‘님‘께서 담화를 할 때면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들러리가 됐다. 여러 기자는 담화를 끝내고 나가는 박 전 대통령의 뒤통수를 묵묵히 바라봤다.
기자들은 병풍처럼 앉아
가만히 받아 적기만 했다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대변해야 하는 기자가, 당시 청와대에 있긴 했을까? 이때만큼은 수습 기자보다 못해 보였다. 거칠고 끈질기게 질문하는 패기가 없었다.
아무리 청와대로부터 질문 안 받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해도, 어떻게든 질문해야 했지만 그러질 않았다. 질문 없는 기자회견을 거부할 배짱도 없었다.
지난 1월 1일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청와대 기자단과의 신년 기자 간담회. 노트북 속기, 휴대전화 녹음, 사진 촬영이 모두 금지된 ‘언론 통제’ 상황이었지만 기자단은 참석했다. ⓒ 청와대
이뿐만이 아니다. 질의응답이 있더라도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기 일쑤였다.
누가, 어떤 순서로, 무슨 질문을 할지 다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대변인은 ‘질문 있는 기자는 손을 들라’고 했고, 기자들은 간간이 손을 들어 의사 표시하는 척했다. 말 그대로 쇼다.
심지어 2016년 초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들이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문을 하자 박 전 대통령은 “머리 나쁘면 이거 다 기억 못 해요, 질문을 이렇게 한꺼번에 하시면..”라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청와대-기자단 간의 담합 기자 회견이란 말이 딱 맞았다.
본분을 망각한 ‘비보도‘ 원칙
소신 있는 행동을 했다가
되려 징계를 받았다
세월호 참사 엿샛날이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진도체육관 응급처치 테이블 위에서 컵라면을 먹은 것에 대해,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경솔한 말을 내뱉어 논란을 빚었다.
민 전 대변인은 “라면에 계란을 넣어 먹은 것도 아니고, 쭈그려 앉아서 먹은 건데.. 국민 정서상 문제“라고 발언했다. 비(非)보도 전제였지만, 분명 부적절한 말이었다.
오마이뉴스, 경향, 한겨레, 한국일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민 전 대변인의 말은 국민 정서와 상당히 대치됐다. 대통령의 ‘입’으로 통하는 청와대 대변인의 말은 곧 대통령의 의중이었기에, 비보도 약속을 깨고 이를 보도했다.
오마이뉴스의 첫 보도 이후 SNS를 통해 이 뉴스는 삽시간으로 퍼졌다. 보도가 확산되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비보도 원칙도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비보도 원칙을 고수했다. 이를 보도한 네 언론사에 대해 출입 정지 징계를 내렸다.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에서다.
나중에 출입 정지 기간이 하향 조정됐지만,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은 무려 9주의 출입 정지를 통보받았다. 종합 일간지, 방송사. 통신사 등 7명의 매체별 간사들이 결정한 결과였다.
과연 누구를 위한 비보도였을까?
본래 청와대의 비보도 원칙은 국가안보, 외교, 대통령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적용된다. 민경욱 대변인 발언은 이와 전혀 관련 없었다. 비보도 전제가 부적절한 말의 무적 방패 역할을 하도록 그냥 둬서는 안 된다.
청와대 출입 기자단 간사들의 일부 언론사 출입정지 결정은 ‘우리는 안 썼는데, 왜 너희만 써’ 심보로 동료 기자들을 청와대에서 내쫓은 셈이다. 권력의 감시견(監視犬)이어야 할 언론이 저 스스로 권력의 충견(忠犬)이 됐다는 세간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지난 1월 1일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청와대 기자단과의 신년 기자 간담회. 노트북 속기, 휴대전화 녹음, 사진 촬영이 모두 금지된 ‘언론 통제’ 상황이었지만 기자단은 참석했다. ⓒ 청와대
박근혜 불통, 알면서 묵인하다
고백하건대 나 또한 받아쓰기 기자였다. 18대 대선을 두어 달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대통령 후보들의 행보를 뒤쫓으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일을 자주 맡았다. 일명 마크맨이다.
대선 후보들 간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즉문즉답 회견을 거의 하지 않았다. 준비된 말이 있는 경우에만 카메라 앞에 섰다. 질의에 대답해도 몇 분에 그쳤고, 알맹이 없는 말일 때가 허다했다.
사실 대개의 대선 후보는 매일 장소만 바꿀 뿐, 어제와 비슷한 말을 하곤 한다. 박 후보는 여기에 더해, 질문조차 잘 받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제와 다른 기사를 만들어 내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적어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후보와의 질의응답이 있어야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참다못한 한 신문사 기자가 박 후보 캠프 보좌관에게 따져 물었다.
“보좌관님,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기자들 질문에 제대로 응대 안 하시면 의혹이 있어도 반박 내용 못 넣어요. 기사 제목이라도 뽑게 도와주셔야죠.”
“죄송해요. 기자님들. 시간이 팍팍해서 그러는데요. 후보님께 말씀 잘 전달할게요.”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결국 우리는 후보 앞을 막아서서 질문해 보기로 했다. 작정하고 질문을 딱 세 개만 취합해, 밀어붙이기로 했다. 일정을 마치고 차에 타려는 박 후보를 기자들이 거칠게 막아섰다.
경호원들의 몸짓이 분주해졌다.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고, 둥글게 박 후보를 둘러쌌다. 곳곳에서 “질문에 답 좀 주세요”란 기자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지만, 기어코 박 후보는 차에 급하게 올라탔다. 끝내 우리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기자들의 질문을 잘 받지 않았다. ⓒ 셜록
진짜 문제는 오히려 그 후에 발생했다.
박근혜 후보의 ‘질의응답 거부’
기사를 쓰는 매체는 거의 없었다
질문을 받지 않는 박 후보에게 적극적으로 책임을 묻는 기자는 찾을 수 없었다. 기자답게 ‘기사’로서 말이다. 당시 현장에 있는 기자들 모두, 그의 불통 자세에 불만을 가졌지만, 다음날 이 내용을 기사로 실은 매체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기자는 여느 날처럼 단순히 후보의 말을 옮겨 담는 ‘받아쓰기’식 기사를 썼다. 꾸역꾸역 박 후보 연설의 특이점을 찾아 주제를 잡고 기사를 만들었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굳지 나까지 쓰지 않아도 될, 고만고만한 내용이었다. 차이라면 제목과 단어 몇 개 정도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단초를 연 TV조선이 대중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특종을 남긴 것은 분명 칭찬받을 만한 사실이지만, 그 전까지 박 전 대통령에게 연일 날개를 달아준 일에 대한 사과는 지금까지도 없다.
박 전 대통령이 보여준 수많은 자질 부족의 단서들을 쉬이 지나치며 수년간 보도하지 않았다. 의문을 품지 않았다.
지상파를 포함한 대다수 언론이 그렇다. 최순실 게이트에 뒷짐을 지고 있다가, 뒤늦게 상황이 급변하자 정의와 헌법수호를 논하며 박 전 대통령을 물어뜯는 태도는 대중의 비웃음을 사기 충분했다. 권력을 제때 제대로 감시하고 보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와 자성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박 전 대통령 탄핵과 구속에는
언론의 책임도 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 전에, 나를 포함한 언론인들이 박 전 대통령의 자질을 제대로 따져 물어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의 패션을 ‘색(色)의 정치’라 치켜세운 과거 보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말이다.
일부 보수 언론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패션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했다는 평가가 있다. ⓒ 청와대 공식 유튜브
40여 년째 앵무새 노릇 중
‘기자와 개는 접근 금지’
무서운 유신의 칼날에 언론이 정부의 나팔수가 됐던 1971년,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은 위와 같은 팻말을 농성장에 걸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 탓에 당시 동아일보는 정부 입맛대로 난도질당한 신문을 발행했다.
대학생들은 무기력한 언론인에 격분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동아일보 화형식도 열었다. 학생들은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날 선 성토의 글을 남겼다.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 기사는 판매 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과연 달라졌는가?
세월호 참사에서 확인한 언론의 민낯은 40여 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언론은 정부의 언론 브리핑에 따라 ‘세월호 탑승객 전원 구조’라는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어 보도했고,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은 김시곤 KBS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보도를 통제를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언론은 잠수 요원 수십 명이 희생자를 구조하고 있다는 정부의 거짓 보고를 받아 쓰며 정부의 앵무새 노릇을 자처했다. 무려 27회에 달했던 인천지검의 ‘유병언 수사’ 비공식 브리핑 또한 그대로 받아쓰며, 마치 유병언만 잡으면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처럼 여론을 몰아간 것도 언론이다.
무너진 언론에 대한 신뢰는 어디부터 재출발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기자의 지위와 신임은 ‘어떤 출입처를 출입하느냐’가 결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력 기관을 출입한다고 해서 기자 본인에게도 권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청와대 출입 기자를 ‘1호 기자’라 칭하는 내부 분위기를 깨야 한다.
환상에서 나오자. 어깨에 들어간 힘부터 풀자.
기자가 기레기(기자+쓰레기)가 아닌 권력의 감시견으로 돌아가는 길은 간단하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면 된다. 권력의 말끝마다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 시작이다.
1974년 10월 24일 언론인들은 동아일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