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웅아, 제일 기억에 남는 아빠 모습은 뭐야?”
10살 기웅(가명)은 엄마의 질문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아빠가 어떤 여자랑 팔짱 끼고 있는 모습.”
아이는 싱글맘 강하나(가명, 만 36세) 씨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빠의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
아이는 엄마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엄마가 있는데, 왜 다른 사람이랑 팔짱을 끼지?… 라고 생각했어.”
강 씨는 충격을 받았던 1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2018년 11월, 강 씨가 양육비 안 주는 전 남편 장원기(가명, 당시 만35세) 씨를 상대로 아동복지법 위반으로 고소 준비를 할 때였다. 강 씨는 그때도 아이에게 아빠와 함께 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9살 기웅은 도화지 위에 엄마가 아닌, 낯선 여성과 팔짱을 낀 아빠를 그려졌다. 그림에서 낯선 여성은 기웅을 가리키며 묻고 있다.
“쟤는 누구냐.”
아빠는 그림속에서 여성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냥 가자.”
기웅은 자신이 겪은 2014년 5월께 일을 그린 것이다. 당시는 수개월 만에 만난 아빠가 아이에게 키즈카페에 가자고 한 면접교섭 날이었다. 면접교섭은 이혼 후 자식을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자식을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권리다.
엄마 강 씨는 아이의 그림을 두고 최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면접교섭 날, 아이를 방치하고 애인과 영화보러 가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10살 아이가 5살 때 겪은 일을 기억할 줄 몰랐습니다. 아이 그림을 살펴보니, 아빠의 모자나 안경, 옷 등을 상세하게 표현했더라고요. 아빠를 그리워한 아이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거잖아요.”
2010년 결혼식을 올린 강 씨는 결혼 생활 2년 만에 남편 장 씨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신혼 1년 차 때부터 시작한 남편의 가정폭력을 참을 수 없었다. 2012년 2월, 강 씨는 두 살 아이만 데리고 신혼집을 나왔다.
아내 강하나-남편 장원기 부부는 2015년 9월 이혼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유책배우자인 남편에게 위자료 3000만 원을 청구했다. 친권과 양육권은 아내 강하나에게 돌아갔다. 비양육자의 면접교섭은 매달 2주, 3주, 5주차 주말로 인정됐다.
법원은 이 부부가 별거 중이던 2012년 12월부터 소급적용해, 남편에게 매달 양육비 60만 원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장 씨는 이혼 판결을 받은 2015년 9월부터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2014년부터 약 1년간 총 5~6차례 이뤄진 면접교섭은 이때부터 아예 끊겼다.
싱글맘 강 씨는 자라는 아이를 보며 덜컥 겁이 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가족에 대해 배웠고, 주변 친구들을 통해 아빠의 부재를 알아갔다. 아이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온 날에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왜 아빠가 없어?”
생일 때는 입버릇처럼 아빠를 찾기도 했다.
“이번 생일에 아빠가 곰 인형을 사주면, 그동안 아빠한테 느꼈던 서운한 기분이 풀릴 것 같아!”
아빠는 가정폭력 가해자라고, 수년간 양육비도 주지 않는 나쁜 아버지라고 아이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아이가 커갈수록, 강 씨는 양육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양육비는 양육자의 권리를 넘어, 부모로서 아이를 향한 관심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들에겐 가급적 두 부모의 사랑이 전달돼야 해요. 그 첫 걸음이 양육비라고 생각해요. 양육자인 엄마가 ‘아빠는 널 많이 사랑해’라고 늘 말해도, 아이는 크면서 점차 아빠의무관심을 알게 돼요. 아이는 배우고 싶고, 입고 싶고, 먹고 싶은 걸 혼자 자기를 키우는 엄마를 생각해 말하지 못해요. 아이가 슬픔을 속으로 삭이면서 자존감도 떨어지고, 우울감도 높아질까봐 항상 염려돼요.”
사실 그녀는 양육비를 받기 위한 법적 절차를 다 거쳤다. 여성가족부 산하 양육비이행관리원을 통해 양육비 ‘이행명령’ 소송을 제기했다. 양육비이행관리원은 양육비를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상담부터 재판까지 도와주는 기구다.
2016년 초 당시 밀린 양육비는 2000만 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전 남편은 이미 이혼 소송 중 가게, 아파트, 재산 등을 다른 사람의 명의로 돌려놓았다. 자영업자인 그는 소득 파악도 어려웠다.
반면, 언론을 통해 비춰진 전 남편은 분명 경제 활동을 하고 있었다. 2019년 9월, 추석을 앞두고 관료 인사들이 서울 지역 청과물시장을 방문했을 때 전 남편이 가게에서 일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카카오톡에서도 그의 일상이 그대로 노출됐다. 전 남편은 양육비는 주지 않으면서 골프, 수상레저 등 취미 생활을 즐겼다. 그는 외제차와 명품 모자 등도 애용했다.
문제는 양육비를 받아낼 법적 강제력이 없다 보니, 재판에 이겨도 소용이 없었다. 전 남편은 과거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무시했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가장 강력한 제재인 ‘감치’ 집행 10일을 명령했다. 구치소에 연행된 이후에도 전 남편은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소송 4년 끝에 양육비이행관리원에서는 이런 답이 왔다.
“어머니는 더이상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양육비 ‘이행명령’ 소송부터 다시 시작해야 해요.”
강 씨는 결단했다. 2019년 2월경, 그녀는 양육비 미지급 등을 사유로 전 남편을 아동복지법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부모로서 자식을 위한 생계비를 안 주는 건 아동학대라고 생각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강 씨는 자신이 남편에게 구타당할 동안 늘 옆에 아이가 있었던 점도 고소 사유로 적어냈다. 5년 전 면접교섭 당시 아이를 방치했던 일도 포함했다.
당사자인 초등학생 아이도 아빠를 처벌하길 희망하는 의사를 보였다. 아래는 아이가 재판부를 향해 쓴 편지 일부다.
“판사 아저씨께, 저는 아빠가 없는 어린이 장기웅(가명)입니다. 제 친구들은 다 아빠가 있는데, 저만 아빠가 없어요. 그래서 제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이 제 마음이 속상해요. 아빠가 저한테 잘못이 여덟 가지가 있어요. (중략) 아빠는 제가 모르는 여자와 팔짱을 꼈어요. (중략) 제 마음은 상처가 있는 거 같고 물바다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마음은 아빠를 혼내주고 싶고 속상해요.”
하지만 해당 사건은 무혐의(증거불충분)로 종결됐다. 한국에선 양육비 미지급자를 형사 처벌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 강 씨는 무혐의를 예상했지만, 양육비 미지급자를 제재할 수 없는 현실에 속이 타들어갔다.
“양육에는 금전적 지원 외에도 부모로서 사랑과 관심, 책임과 의무가 포함되어 있어요. 한 쪽만 일방적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건 문제가 있죠. 아이는 아빠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해 정서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어요.”
10살이 된 아이는 점차 친구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아이는 최근 엄마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며 울었다.
“엄마, 학교 도덕 시간에 가족 형태를 배웠는데, 우리 반 애들이 나한테 ‘너는 아빠가 왜 없어?’라고 물어봤어. 그래서 ‘아빠는 해외에서 일하고 계셔’라고 말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어.”
올해도 아빠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레고를 받고 싶다는 아이. 하지만 전 남편은 지난 5년간 아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2019년 12월 기준, 7년간 밀린 양육비는 약 5000만 원. 그나마 올해 6월께부터 양육비 60만 원 중 10만 원을 매달 받아, 아이 간식비에 보탰다.
가정폭력 가해자이자, 양육비 미지급자인 전 남편은 현재 연락처와 주소를 바꿔가며 잠적했다. 그는 지난 18일 강 씨가 새롭게 제기한 양육비 ‘이행명령’ 재판 심문기일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엄마 강 씨 입장에선, 양육비 미지급자를 형사 처벌하는 법안 통과가 절실하다.
OECD 주요 국가들은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공적 사안으로 바라본다. 양육비를 부모 책임으로 여기는 동시에, 아동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에 따라 여러 정책을 편다.
실례로 미국 11개 주는 1886년부터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형사범죄로 규정했다. 아동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는 부모의 행위가 국가 의존적인 피부양자를 만들어 결국 사회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점이다. 즉, 양육비 미지급이 국가 의존적인 사람을 만들어 국가 재정을 위협한다고 바라본다.
현재 미국 50개 주에는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있다. 아이다호 주에선 14년형까지 선고되는 중범죄다.
양육비 미지급자에 대한 형사 처벌 법안이 국회에 아직도 계류 중인 한국 사회에서, 강 씨는 도돌이표 같은 반복에 점차 지쳐 간다.
감치 집행 이후에도 양육비를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버티는 전 남편,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양육비 ‘이행명령’ 소송, 생일만 되면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
강 씨가 겪는 고통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