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내게 소송을 걸었다

아침 7시, 서울역에서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 안. 이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내게 벌어졌다고 상상해봤다. 좀체 감이 서지 않았다. KTX 간이 테이블 위에 소장 하나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원고에는 대한민국, 피고에는 90세 노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부당이득반환 청구였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이 90세 노인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왜 국가는 100세를 바라보는 어르신에게 돈을 내놓으라는 걸까? 도대체 어르신이 부당하게 취한 돈이란 뭘까? 궁금증은 동대구역에 도착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대구 봉덕 시장 옆 골목을 뚫고 어렵게 주소지를 찾아냈다. ‘종합신발백화점’이 나타났다. 바로 옆 녹슨 철문을 여니 낡은 다세대 주택이 나왔다. 시멘트 마당을 ‘ㄷ’ 자로 둘러싼 허름한 2층 집. 오늘 만나기로 한 90세의 강창덕 선생님이 이곳 1층에 사신다.

“좀 누추하지요? 그래도 보증금 300만 원에 월 30만 원짜리 월세방 치고는 괜찮습니다.”

숨이 턱 막히는 집안 열기가 나를 먼저 맞았다. 문 밖의 쨍한 햇볕은 현관을 통과하지 못했다. 살림살이는 여느 집과 다를 바 없었지만 책상이 시선을 확 끌었다. 빼곡한 책들 사이로 한반도기가 꽂혀 있었다. 신문기자 출신답게 시사 주간지와 신문이 책상 주변에 많았다.

안중근 의사의 글귀도 보였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눈앞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의 한자가 포스트잇에 적혀 있었다. 책상은 결의의 문구로 가득했다.

‘애국 결의를 하시는 노인에게 왜 국가는 돈을 토해내라는 걸까.’ 의구심은 씻어지지 않았다.

강창덕(90) 선생님의 방. 침대 한 편에 일간지와 주간지가 쌓여있고, 책상 위에는 펜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셜록

국정원이 모두 뺏어갈 낍니다

강 선생님은 지팡이에 의지해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힘겹게 꺼내셨다. KTX 안에서 본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장이었다. ‘원고 : 대한민국’이 또다시 나를 압도했다. 선생님 손가락은 ‘소관청 : 국가정보원‘으로 향했다. ‘법률상 대표자 : 법무부 장관 황교안’도 짚으셨다. 늘 그러셨다는 듯 한숨과 함께 마른 세수를 하셨다.

요약하자면 이랬다. 2013년 7월 대한민국 중앙행정기관 국정원은 아흔 살의 강창덕 선생님에게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걸었다.

“내가 국정원에 돈 빌린 적이 읍는데 내라는기 말이 됩니까?”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은 2013년 10월 강 선생님에게 6억 8,900만 원과 함께 이자까지 내라고 했다. 법정이자율 5%까지 고려하면 금액은 판결 시점기준 8억 3,300만 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선고 다음날부터 이자가 4배로 뛰었다는 사실이다.

2011년 11월 강창덕(90)선생님이 받은 최고서. 당시 서울고등검찰청은 강 선생님에게 6억 8,900여만 원의 돈을 1개월 이내에 반환하라고 했다. ⓒ셜록

연 20%의 연체 이자율로
현재까지의 빚은
13억 3,300만 원이다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갔다. 숨만 쉬고 있어도 하루에 37만 7,700원 이자가 붙었다.

법원 명령에 따라 강 선생님이 법원에 제출한 재산목록은 너무 초라했다. 월 30만 원짜리 월세방에서 그나마 값이 나간다는 이유로 에어컨과 침대가 목록에 적혀 있었다. 물론 월세방의 300만 원 보증금도 재산 목록에 포함됐다. 국정원이 압류 결정을 받으면 빨간 딱지가 붙여질 것들이다.

강 선생님에게 매월 18만 원씩 지급되는 6.25 전쟁 참전 보상금마저 재산 목록에 기록됐다. 목숨 걸고 참전해 나라를 지킨 분에게 감사의 뜻으로 국가가 주는 돈을, 다시 빼앗으려 하다니.. 슬픔과 분노가 교차했다.

에어컨과 침대가 몇 대 있어야 13억 원이 될까? 참전 보상금 18만 원을 몇 개월 동안 모아야 13억 원을 낼 수 있을까? 강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13억 원을 만져보실 수 있을까?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고급 음식 한 번 몬 먹고..너덜너덜해진 옷 꼬매서 입는 내한테 어떻게 나라가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게 나랍니까?”

강창석 선생님이 사연은 반세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강창덕(90) 선생님의 대학 졸업 사진 뒤로, 미처 떼지 못한 방한용 에어캡이 보인다. ⓒ셜록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신문기자

청년 강창덕은 유능한 신문기자였다. 1956년 서른의 나이에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했다. 적지 않은 나이가 그의 발목을 잡았지만, 뛰어난 필력이 그를 합격시켰다. 1958년 대구매일신문으로 이직한 뒤로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일에 거침없이 펜을 휘둘렀다.

그는 이승만의 여러 만행 중에서도 특히 민간인 학살에 집중했다. 6.25 전쟁 중 2,000~3,000 명의 무고한 목숨이 사라진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다. 폐갱도에 쌓인 수천 백골의 억울함을 기자 강창덕이 처음 세상 밖으로 꺼낸 것이다. 그는 속된 말로 뼈부터 기자였다. 인생의 황금기도 이때였다.

기자는 그에게 천직이었다

사실 끓어오르는 그의 투사 정신은 일제강점기 시절 소년기부터 시작됐다. 열일곱 살 강창덕은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소식을 친구들에게 말했다가 일본 순사에게 소 성기로 만든 채찍으로 무던히 맞았다. 일본군 자원 입대를 거부했다가 끌려가기도 했다. 일본에 목숨을 절대 바칠 수 없었다.

광복 후 20대 청년이 된 강창덕은 분단된 나라가 싫어 평화통일을 위해 싸웠다.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투쟁의 끝은 늘 옥고 신세였다. 웅변대회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했다가 미국과 UN을 비방한 죄로 구속됐고,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반대했다가 수감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강창덕은 모든 게 잘 해결될 거라 믿었다. 5년 간 해오던 기자생활을 이때 마감했다. 민주화를 이뤘으니 통일운동에 몰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쿠데타로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박정희의 군홧발은 초기부터 무자비했다.

강창덕(90)의 월세방의 보증금은 300만 원, 월세는 30만 원이다. ⓒ셜록

민초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다

유신헌법은 순식간에 박정희를 제왕으로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손에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쥐게 했다. 죄목도, 형량도, 재판기관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술 마시다가 말 한 번 잘못하면 바로 끌려가는 시절이었으니 ‘막걸리 긴급조치’라는 별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데 눈 씻고 찾아 봐도 신문 쪼가리에는 기사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나?”

박정희는 언론 자유를 철저히 틀어막았다. 매일 유신반대 데모가 잇따랐지만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았다. 강창덕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펜 하나로 이승만을 날카롭게 비판한 그였다. 진실을 담은 신문이 필요했다. 결국 이재문, 나경일, 백정호와 비밀리에 신문을 만들어 뿌리기로 뜻을 모았다.

다시 기자가 되어 유신의 폐단을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제호는 ‘참소리’로 정했다. 세상의 참된 소리, 진실만을 기록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주로 대학의 유신반대 데모 소식을 실을 예정이었다. 민주화 운동 이력 탓에 사복 경찰의 감시가 심했기 때문에 허름한 여관방에 모여 숨죽여 작업을 했다.

빈틈없이 자체 검열을 했다. 지문 추적을 막고자 고무장갑을 끼고 신문을 만졌다. 잡혔을 때를 대비해 취재 수첩은 늘 빈 종이만 남겨 두었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등사판으로 한 장 한 장 신문을 직접 찍었다. 책잡힐까 동지들끼리 사진 한 장 못 남겼다.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유신 시절, 민초들의 기자가 되려면 몸도 힘들었지만 죽을 각오쯤은 해야 했다. 그럼에도 행복했다. 위태롭지만 정의로운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식에게는 바뀐 세상을 물려줄 수 있다는 희망도 품었다.

“형님, 아무래도 경찰이 뭔가 냄새를 맡은 거 같은데.”

창간호 1000부를 인쇄하고 새벽녘에 배포하려던 찰나, 경찰의 낌새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고 배포를 잠시 유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텔레비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내란 음모 사건 배후에 인민혁명당(인혁당)이 있다”는 정부의 발표가 나왔다.

인혁당이란 말 자체를 처음 들어봤지만 강창덕은 일단 부산에 몸을 숨겼다. 본능적인 결정이었다. 친구들이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엮일 수 있다는 두려움도 컸다. 유신 시대에서는 이런 일이 흔했다.

예상대로 경찰은 그를 쫓았다. 경찰은 그의 일가족을 협박해 그의 뒤를 캤다. 결국 도피 열흘째인 1974년 5월 6일 밤 꼬리가 잡혔고, 강창덕은 즉시 남대구경찰서로 개처럼 끌려갔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 한 여자의 남편이자 세 아들의 아빠였다.

강창덕(90) 선생님 다리에 남은 고문의 흔적 ⓒ 셜록

고문으로 날조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빨갱이 책 보면서 북한 방송 숨어서 들었째? 인혁당, 니가 조직했다이가?”

“그런 사실 없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걸 완강히 부인했다. 같이 연루된 사람들 중 몇몇 아는 사람이 있을 뿐 인혁당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고개를 저을 때마다 고문 수위는 높아졌다. 고문 기술자들은 손발이 묶인 강창덕을 긴 의자에 눕혀 얼굴에 물을 부었다.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으면 실신할 때까지 때렸다. 금세 온몸은 시퍼런 멍 투성이가 됐다.

“검찰 신문에서도 도장 찍은 대로 말 안 하면 뼈다귀를 훑어버릴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악다구니와 비명, 울음소리가 매 순간 좁은 고문실을 흔들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정신은 삽시간에 붕괴됐다. 허리와 무릎은 그의 의지와 달리 움직인 지 오래였다. 진술조서에는 그도 모르게 지장이 찍혀 있었다. 고문으로 만든 조작이었다.

강창덕, 무기징역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1975년 4월 9일. 그는 긴급조치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함께 법정에 섰던 서도원 등 8명은 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형 집행보다는 연쇄 살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와 사형수들은 박정희의 희생양이었다. 각본은 이미 짜여 있었고, 누군가 희생양이 되어 주면 끝이었다. 유신 반대운동을 잠재우고자 박정희는 집요하게 희생양을 찾았다. 불순 세력이 없으면 만들어 냈다. 불행하게도 거기에 강창덕도 포함됐다.

“강창덕, 형 집행정지를 받고 오늘 부로 출소한다.”

1982년 겨울, 그는 성탄절 특사로 8년 8개월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민주세력의 항의로 형 집행정지 결정이 나면서다. 기쁨도 잠시, 먹고 살 길이 없었다. ‘빨갱이 딱지’ 탓에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웠다. 사복 경찰의 감시와 미행은 일상이었다.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막노동, 술장사, 만화방까지 운영했다. 시장에서 배추 찌꺼기도 주워봤다.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다. 빨갱이 자식이란 손가락질에 수없이 전학을 다닌 세 아들에게 미안했다. 아버지와의 아기자기한 추억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평생 한으로 남았다.

차차 집안에 여유가 생길 무렵, 국민학교 분교 교사의 아내에게 사고가 났다. 출근길 버스에서 떨어지면서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아내는 2년을 못 버티고 1987년 여름 세상을 떴다. 아내의 헌신을 평생 갚으려고 했지만 하늘은 무심히 아내를 일찍 데려갔다.

강창덕(90) 선생님 허리와 무릎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보호대가 매여있다. ⓒ 셜록

박정희 딸 박근혜, 그를 빚더미에 앉히다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되고, 2009년 8월 강창덕은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 약 15억 2,200여만 원을 가지급 받았다.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확정된 배상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평생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받으며 억울하고 가난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대가였다. 한을 품고 죽은 아내의 목숨값이기도 했다.

독방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부인과 세 아들이 흘린 눈물을 다 거둘 수만 있다면, 돈 따위는 안 받아도 괜찮았다. 어떠한 물리적인 화폐도 날아간 인생과 맞교환될 수 없었다. 얼마를 줘도 파괴된 가족의 삶은 복구될 수 없었다.

손해배상금을 받고 지금껏 신세 진 곳에 먼저 연락했다. 온전하지 않은 몸 때문에 제대로 돈벌이를 할 수 없었던 그는 주변에 손을 많이 벌렸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쓴 병원비, 죽은 아내의 병원비, 아이들의 교육비에 보탬을 주신 지인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의 안위는 나머지 보상금 3분의 1이
나올 때까지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돈을 가장 값지게 쓴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민주화 운동 관련 단체 후원이었다. 후손들을 위해라도 암흑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길 바랐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생각하며 재정이 어려운 민주화 운동 단체에 기부를 아끼지 않았다.

그 중에는 천주교인권위원회도 있었다. 인혁당 사건 진실 규명에 여러 신부님이 오랜 세월 앞장섰다. 민족자주평화통일회의 등 통일 운동 단체에서는 고문으로 있으면서 매월 후원금을 냈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도 만들었다. ‘4·9통일평화재단‘이다. 사형수 여덟 분의 유족들은 물론, 무기수 유기수 피해자들이 배상금을 떼어 2008년 재단을 설립했다. 반통일, 반평화, 반인권적인 국가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십시일반 힘을 모았다.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2011년 1월 청천벽력 같은 판결이 떨어졌다.

“사건 발생일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나 화폐 가치가 변했으니 이자는 2009년 8월부터 계산한다.”

축하 꽃다발을 들고 있던 이들은 주저앉았다. 대법원이 인혁당 사건 무기수 유기수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배상금의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며 34년 치 이자를 삭제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가 받은 돈의 절반 가량인 6억 8,900만 원이 무효가 됐다.

최악은 그 후에 벌어졌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니 국정원이 돈을 돌려달라며 2013년 7월 소를 제기했다. 그것이 바로 부당이득반환 청구소송이다.

법원은 국정원과 강 씨가 ‘반환금을 서로 절반씩 부담하면 어떻겠느냐’는 화해 권고안을 내놓았지만 국정원은 이를 거절했다. 강창덕 선생님은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았다. 2017년 6월 기준 반환해야 할 돈은 13억 3,300만 원을 넘어섰다.

“경천동지할 일 아입니까. 원통해서 국정원 마당에서 분신자살을 할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박정희가 그의 인생을 파괴했고, 딸 박근혜는 그를 채무자로 만들었다. 역사 앞에 단 한번도 비겁하지 않았던 그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 전쟁, 이승만 독재, 박정희 유신까지..

그는 항일운동, 민주화 운동, 통일운동 대가로 7번 투옥돼, 13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진실만 좇았는데..기자로서 진실만 기록한 것뿐인데..유신시대는 저한테 안 끝났습니다.”

인혁당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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