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때 폐지됐다던 연좌제는 사실 살아있다. 레드 콤플렉스에 기한 덕이다. 전영순(62살)이 산증인이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영순은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날부터빨갱이의 자식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지기까지 무려 33년이나 걸렸다. 아버지가 기뻐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빨갱이 딱지를 떼지 못하고 31 돌아가셨다. 영순은 무죄 판결문을 아버지 무덤 위에 올려 드렸을 뿐이다.

아버지는 사라졌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통은 영순에게 고스란히 대물림 됐다영순의 학업, 취업, 결혼에서 아버지의 어두운 과거가 늘 걸림돌이 됐다. 상속된 고통은 덧나기를 반복하는 상처가 됐다.

고통의 연좌제다

20살 영순은 이제 62살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를 넘어선 지 4년째다. 장성이 된 아이도 둘이나 있다. 세월은 고통을 치유한다는데, 왜 영순의 고통은 그동안 치유되지 못한 것일까?

이야기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영순이 아버지가 투옥됐던 옛 서울구치소를 바라보고 있다. ⓒ 셜록

영순의 집은 부유했다. 아버지 전재권(1928년생)은 대구의 유지였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지나가던 동네 꼬마도 아는 양복 도매점을 크게 운영했다이름은 ‘승리라사점’이다. 승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장사는 잘됐다.

아버지는 심보 나쁜 장사꾼이 아니었다. 금고에 돈만 채워 넣기를 바라지 않았다. 남몰래 민주화 운동에 힘썼다삼선 개헌 반대운동 등 반독재 반유신 운동에 몸 담았다. 젊은 시절에는 동아일보 기자이기도 했다. 유능하고 깨인 아버지는 늘 경찰의 감시 대상 1순위였다.

영순은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구두 한켤레 허투루 사 신지 않으면서도 소신만큼은 변함없는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아버지는 돈의 쓰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자식들에게 ‘유산 한 푼 남기지 않겠다’ 호언장담하면서도, 민주화 운동에는 조건 없는 경제적 지원자가 됐다.

아버지는 민주화 운동이라면
쉽게 지갑을 열었다

아버지는 동갑내기 친구 송상진 선생과 각별했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나온 뒤 송 선생이 이렇다 할 밥줄을 못 찾아 고생 중이었다. 아들 고등학교 입학금도 없어 절절맸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아버지는 송 선생 손에 선뜻 5만 원(현재 65만 원 상당)을 쥐여 줬다. 민주화 운동으로 경찰에 쫓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3,000원(현재 3만 9,000원 상당)을 여비로 줬다. 송 선생의 뜻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1974년 4월 30일.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그 날,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셋이 양복점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누구시오”라는 물음을 집어삼킨 채 다짜고짜 아버지를 끌고 나갔다. 아버지가 취미로 만든 등산회와 테니스회 명부도 가져갔다. 그때까지도 영순은 알지 못했다. 그날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

전영순의 어린 시절 가족 사진. 아버지와 어머니, 전영순과 둘째 동생 전영옥이 있다. ⓒ 셜록

친구 아들 입학금국가 전복 지원비 둔갑

아버지의 죄목은
‘자금책’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아버지가 인혁당 재건위에 자금을 댔다고 밝혔다영순은 인혁당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나는 확실했다. 아버지는 절대 나쁜 일을 저지를 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몇만 원 줬다고 자금책이 될 리도 만무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아버지가 송상진 선생을 알고, 푼돈이나마 선생에게 건넸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를 조작 사건에 엮어 넣었다참 손쉬웠다. 증거도 없고, 뚜렷한 증언도 없었지만, 중앙정보부는 손쉽게 아버지를 국가 전복을 꿈꿨던 빨갱이로 만들었다.

아버지가 떠난 양복점을 경찰들이 지켰다. 매일 문 앞에 진을 쳤다. 경찰은 오는 손님마다 신상과 방문 이유를 물었다. 자연스레 손님의 발길은 끊겼다. 대구의 으뜸 양복 천 도매점이 문을 닫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풍족했던 살림은 조금씩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뜬소문은 삽시간에 동네 전체로 퍼졌다. 엊그제만 해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이웃의 얼굴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혹시 나도 엮일까외상값을 갚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그때 돌려받지 못한 돈은 무려 2,000 (현재 2억 6,000만 원 상당)에 달한다. 그럼에도 영순은 아버지를 믿었다.

죄를 지은 게 없으니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리라

전영순이 아버지가 투옥됐던 옛 서울구치소를 둘러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셜록

영순은 이 사실을 동생들에게 숨기기로 했다. 일단 집 안에 있는 신문을 모조로 감췄다. 특히 국민학교에 다니던 넷째와 다섯째 동생이 걱정됐다. 어린 동생들이 상처를 받을까 봐서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구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에 다니던 동생들은 그때부터 학업을 놓다시피 했다. 고3이었던 둘째 동생은 입시 책 내려놓고 부엌칼을 들었다. 언니 영순과 어머니가 서울에서 아버지의 구명 활동을 벌이는 동안 자신이 동생들의 엄마가 되어야겠다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아갈 없었다. 하루아침에 빨갱이 가족이 된 영순의 집에는 늘 어두운 그늘이 떠나지 않았다. 남동생들은 친구들과 치고받고 싸웠고, 여동생들은 의기소침해졌다. 아들을 뺏긴 할머니는 하루가 멀다고 술을 드셨다.

동생들은 박정희가 나온
신문만 보면  변기에 찢어버렸다

아버지를 가둔 사람들의 얼굴이 매일같이 뉴스 첫머리를 장식하자 신문에 분풀이한 것이다. 가위로 신문을 난도질하고 찢어 갈겼다. 그렇게나마 분노를 삭이고 싶어서다. 사실 그것 말고는 끓는 원통함을 씻을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영순의 가족을 버렸었다.

빨갱이 가족주홍글씨를 달고 살다

어머니 정점매(83) 남편 구명 활동에 생사를 걸었다. 영순도 함께했다. 재판은 허울뿐인 쇼나 다름없었지만 모녀는 재판이 있는 날이면 대구에서 서울로 향했다. 석방 운동이나 기도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별것 아닌 것에도 제약은 많았다. 군법회의 재판에는 딱 1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입장 전에 샅샅이 몸수색을 당하는 터라 어머니는 손가방을 영순에게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영순은 어머니의 손가방을 끌어안고 수도방위사령부 앞에서 재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는 인혁당 재건위 구명 활동에서 물주였다아버지가 민주화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어머니도 그랬다. 다른 피해 가족보다 살림이 나았기에, 그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형편이 어려운 분 뒷주머니에 몰래 여비를 찔러 줬다. 구치소 인근에 여관방을 얻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구명활동이라면
쉽게 지갑을 열었다

남편의 무고함만 증명할 수 있다면, 어머니는 곡기도 끊을 각오까지 했다. 실제로 금식 기도도 했다. 어린 자식들을 대구에 두고, 서울에서 남편의 구명활동에 온 힘을 다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내 15 형을 확정받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8명의 영혼을 위로할 틈도 없이, 아버지는 안양 교도소로 바로 이감됐다. 첫 면회를 가는 길에 영순은 다짐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수감자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8명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리라.’

1975년 4월 8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대법원 판결 직후 모습 ⓒ 4·9통일평화재단

하지만 어머니는 영순이 구명 활동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딸의 앞날마저 망가지는 게 걱정돼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찰이 늘 영순의 주변을 배회했다. 혹시 민주화 운동에 동참할까 경찰은 대학 캠퍼스까지 들어와 영순의 뒤를 밟았다.

영순이 있는 일은 어머니의 호소문을 쓰는 것이었다어머니의 목소리를 펜으로 옮겨 적었다. 호소문을 뿌릴 수 없을 때는 옆방에 사는 신혼부부에게 부탁해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 전달하기도 했다. 참 다행스럽게도 따뜻한 사람은 있었다.

언론은 이미 박정희 편이었기에
믿을 수 없었다

언론에 글을 투고해 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독재정권의 눈치만 살피면서 현실을 외면했다동물원에서 사육하던 동물이 새끼를 낳으면 경사인 양 크게 보도하면서 공안 조작 사건은 왜곡하고 축소보도 하기 일쑤였다.

간신히 감시를 피해 구명 활동에 나서도 그 후가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투고문이 공개되면 그곳이 어디든 경찰은 영순을 잡으러 왔다안전하게 집까지 돌아가는 것도 힘들었다. 경찰에 끌려갈 것이 뻔했다.

그럴 때면 진보계 인사들이
영순의 손을 잡아 줬다

이희호 여사가 그중 한 명이었다. 기독교회관에 갇혀 쩔쩔매고 있을 때 이희호 여사가 영순을 차에 태워 밖으로 빼내 줬다. 함세웅 신부와 고은 시인은 영순을 딸처럼 대했다. 잘 곳이 마땅치 않으면 손목을 잡고 당신들의 집으로 데려갔다. 영순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큰 이유다.

귀와 눈을 멀게 고문 후유증

1년 만에 철창 너머로 본
아버지의 얼굴은 낯설었다

또렷했던 눈매는 흐려져 있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주말마다 등산을 가셨을 정도로 건강하셨는데 푸석하고 홀쭉해진 아버지 얼굴이 영순의 가슴을 쳤다. 결국 눈물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아버지..아버지..”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라. 나는 너희가 걱정이다.”

“도대체 누가 그런 거예요.. 아빠 피부는 또 왜 그래요..”

“여기 이불이 좀 축축해.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있으니까 엄마 잘 모시고.”

첫 면회는 5분도 안 돼 끝났다. 억지 재판, 아버지의 무고함에 관해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교도관이 아버지 뒤에서 다 듣고 있었다. 나눌 있는 대화는 건강이나 안부뿐이었다영순은 나오자마자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무리 봐도 건강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진짜 수감 생활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형을 받은 이태환 선생의 부인 구두선 여사가 남편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줬다.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을 앓으며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역시 영순이 느낀 그대로였다. 아버지는 아픈 맞았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끌려갔다 풀려난 대학생들이 아버지의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다. 그 대학생들도 늘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영순의 집에 찾아온 것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전재권 선생님께서 수감 중에도 저희를 많이 챙겨 주셨어요. 없는 음식, 저희에게 양보하시고요. 대신 감사 말씀 전해드리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순은 아버지를 자주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면회가 최대 2명만 가능해 동생들과 조부모님, 아버지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교도소를 찾았다. 영순은 어머니를 따라 1년에 많아야 두어 번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얼굴은 계속 안 좋아졌다.

아버지의 얼굴은 거칠고
몸은 야위어 있었다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던 분인데 아버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시력마저 잃어 앞을 또렷하게 보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에서의 고문은 아버지의 귀와 허리도 망가뜨렸다. 전기 고문의 충격으로 고막이 터져 귀가 먹었고, 오랜 폭력은 허리를 못 쓰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교도소에 “제발 종합검진만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이 아니라 애원에 가까웠다. 남편을 감옥에서 잃고 싶지 않았다. 교도소는 거절했다. 이미 고혈압, 당뇨, 빈혈, 간장, 위장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외부 진찰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제
어머니마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버지가 끌려가던 그 날처럼 “간단히 조사할 것이 있다”며 경북도경 대공분실로 어머니를 끌고 갔다. 어머니의 구명 활동을 나쁘게 여긴 경찰이, 박정희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 하나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어머니를 엮으려 했다.

“야, 이 X아. 서울 기독교회관 가서 염병할 거야 안 할 거야? 다시 서울 올라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못 나갈 줄 알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음날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생을 마감하면서 운 좋게 바로 풀려났다. 아버지도 이를 기점으로 곧 풀려날 줄 알았지만, 2년 반이 지나서야 세상 밖으로 나왔다. 1982 3 2, 아버지의 8년간 무고한 세월이 끝이 났다.

아버지의 건강은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호탕하던 성격은 사라지고, 날마다 병과 사투를 벌였다. 철쭉이 만개했던 1986 5 7, 아버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출소 후 불과 4년 2개월이 지났지만, 향년 58세에 운명하셨다.

전영순 ⓒ 셜록

가해자 국정원, 피해자 아파트를 경매에 부치다

“아무래도 제가 옥중에 자주 넣어 드린 사탕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왜 아버지는 옥중에 늘 사탕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전영순은 인터뷰 내내 흐느꼈다사실 세 번의 인터뷰 모두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기자의 질문은 날카로운 꼬챙이처럼 영순의 과거를 계속 건드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깊은 상처가 전영순의 마음 어딘가에 있는 게 느껴졌다.

“제가 아직도 어두운 곳에 못 들어가요. 중국 연태로 관광 갔다가 우연히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때 공포로 울부짖으면서 뛰쳐 나왔어요.. 철창만 봐도 살이 떨리고..”

“아내와 운전할 때면 저는 내비게이션을 무시합니다. 남산 터널을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어요. 멀더라도 늘 터널을 피해 갑니다.”

묵묵히 인터뷰를 듣고 있던 남편 박흥식(65살)이 우는 아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 대신 아내의 트라우마를 기자에게 설명했다.  사람은 아버지 전재권이 투옥 중일 만나 결혼했다박흥식은 누구보다 아내의 과거와 현재를 잘 안다.

“아내의 고통을 어떻게든 보상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 집도 그렇고 부동산은 모두 아내 명의로 했어요. 그런데 그게 발목을 잡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국정원이 집을 뺏어갈 줄 누가 알았나요.”

사실 인터뷰를 진행한 아파트는 경매에 넘어간 상태였다. 1차 경매는 이미 지난 6월 14일에 진행됐다. 다행히 그때는 낙찰이 안 됐다. 하지만 2 경매가 코앞이었다. 바로 코앞, 7 19일이 2 경매일이다.

경매를 신청한 채권자는 국정원이다

국정원은 2013 7가지급 받은 국가배상금 일부를 토해내라 전영순에게 부당이득반환 청구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전영순은 갚을 수 없는 처지였고, 국정원은 반환금을 받아 내기 위해 영순이 소유한 아파트를 경매에 부쳤다.

대법원이 2011년 1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지연 이자를 다 줄 수 없다’는 식의 근거로 30여 년 치의 지연 손해금을 삭제하는 판결을 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영순은 억울한 마음에 신용카드 현금서비스까지 받아가며 항소에 상고까지 국정원에 맞섰지만 결국 모두 기각됐다.

연 20%의 연체 이자율은 무서운 속도로 현재까지 몸을 불려 나갔다. 1 9,100 원의 반환금은 금세 37,900 원이 됐다. 애초 금액에 2배가 것이다. 가지급 받은 배상금 4억 2,300만 원과 비슷한 수준까지 금액이 커졌다.

넷째 동생은 암 투병 중
국정원에 돈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동생들이 버티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금융권 연체이자율보다 높은 이자율에 둘째와 셋째 동생은 개인회생 신청을 했고, 넷째와 다섯째 동생은 빚을 전부 갚았다. 어머니도 감당이 안 되는 스트레스 탓에 아버지의 고통 값을 국정원에 반환했다.

“법정에서 국정원 직원을 만났을 때 ‘제발 국정원 본연의 일을 하라’고 소리 쳤어요. 최후 변론에서도 울면서 호소했고요. 어떻게 가해자가 채권자가 될 수 있냐고요.”

사실 국정원은 아파트만 뺏은 게 아니다. 연금은 물론이고 영순이 가진 7 통장 모두를 압류했다. 국정원에 의해 경매에 부쳐진 지금의 아파트도 절반가량 대출을 받아 산 거라 매달 대출 이자를 갚아야 했지만, 통장이 압류된 탓에 제대로 이자도 낼 수 없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묻혔던
선산까지 압류했다

“아파트는 압류돼서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고, 선산까지 압류되고..제가 원통은 하지만 ‘분납해 갚겠다‘고 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영순이 고집스럽게 지키는 원칙이 있다. 대물림 된 고통을 자신의 아이들에게 다시 상속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빨갱이 자식 고통을 자신의 세대에서 끊고 싶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 애들한테는 절대 부담 주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요.”

과연 영순의 의지대로 고통의 사슬을 끊어질 수 있을까? 바뀌지 않는 사실 하나, 2차 경매는 7월 19일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