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아버지 나경일(1930년 생)은 2009년 8월 국가배상금 12억 7,000여만 원을 받고 얼마 안 돼 몸져누웠다. 숱한 고문도 끈질기게 견디셨건만, 2009년 초여름 돌연 대장암에 걸리셨다. 병을 발견했을 때는 손을 쓸 수도 없었다. 대장암 4기였다. ‘노후에는 돈에 시달리는 일 없겠구나’하는 기대는 무색해졌다. 노후를 누릴 새가 없었다.
배상금은 고스란히
치료비에 쓰였다
돈이 많이 남지도 않았다. 빚을 갚고, 변호사 비용을 내고, 어머니와 지낼 집을 사고 남은 돈 중 일부를 4·9통일평화재단을 비롯한 민주화단체에 기부했다.
당신과 함께 활동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도 금일봉을 전달했다. 전략당(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휘말려 가정이 망가진 집안에 위로금을 건넸다.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의 진상규명에 힘써준 파란 눈의 시노트 신부님께도 드렸지만, 신부님은 “한국은 아직 민주화가 되지 않아 받을 수 없다”며 고사하셨다.
이제 정말 아버지 당신을 위해 사시는 일만 남은 듯했다. 돈이 망가진 삶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찢어지게 가난했던 세월을 이제 끝낼 줄 알았다.
하지만 불청객 암이 찾아오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대장에서 시작한 암은 다른 장기로 빠르게 전이됐고, 아버지는 빠르게 야위어 갔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정의 웃음도 그때 사라졌다.
“여서 제일 비싸고 좋은 병실로 주소.”
의사는 아버지가 가망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가길 희망했다. 아들 나문석(60)이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가장 좋은 병실을 예약하는 것이었다.
‘모진 세월과 맞바꾼 배상금을 고문 때문에 병든 몸 치료하는 데 쓰다니.’
이보다 더 모순된 상황이 또 있을까. 반평생 절뚝거렸던 발목이 손목보다 더 가늘어졌지만, 문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나경일 선생의 장남 나문석(왼쪽), 나경일 선생의 장녀 나은주(오른쪽) ⓒ 셜록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시게 돼 영광입니다. 의사 생활 오래 했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병문안 오기는 처음이네요.”
아버지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많이 사람이 병문안을 왔다. 그럴 법도 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당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셨다. 정의로운 일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늘 총대를 메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양원에 오기 직전 ‘국가배상금으로 민주화운동 원로들과 함께 분단국가였던 베트남에 다녀오고 싶다‘는 소원대로 아버지는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때 동행했던 여러 선생님들은 아버지의 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아버지를 보자마자 오열했다.
삼성 최초 노조 결성을 주도하다
아버지는 우리나라 노동운동 1세대다. 1960년 제일모직 재직 당시 부당한 노동환경에 저항하고자 노조를 만들려고 한 것이 첫 단추였다. 당시 제일모직의 노동환경은 나빴다. 밤낮으로 교대하며 일을 해도, 월급은 쥐꼬리만 했다.
노조 결성은 실패로 끝났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1960년 12월 아버지를 내쫓았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노조는 안 된다”는 이병철의 유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경일 선생의 부인 임분이 선생(왼쪽)과 나경일 선생(오른쪽). 몇 장 없는 부부 사진 중 하나다. ⓒ 셜록
반독재 반유신 운동에 동참하자 정부마저 아버지를 탄압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까닭 없이 아버지를 구금시키더니, 박정희 정권은 두 번이나 아버지를 간첩으로 몰았다.
존재하지도 않은 ‘전략당’ ‘인혁당 재건위’에 몸담았다며 ‘민족의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두 번의 투옥 생활 때 몸이 찢기는 고문을 당했고, 근 10년을 무고하게 감옥에서 지냈다.
낙인을 지우는 데 무려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지만, 무죄 판결 전에도 아버지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올곧은 생활을 했다. 생계를 위해 경비원 일을 할 때 아무도 시키지 않았음에도 관리비 거품을 30% 걷어내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련할 정도로 ‘옳음’을 좇았다. 그런 생활은 요양원까지 이어졌다. 고통의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부지, 아프면 제발 고함치고 그러세요. 참지 마시고요..”
“내는 개안타, 석아. 이것 가지고는 개안타.”
‘길어야 일주일 사실 것 같다’는 병원 쪽 말과 달리 아버지는 정신력으로 몇 달을 더 견뎌냈다. ‘고통을 감수하는데 인이 박인 것인가.’ 지켜보는 가족들은 타는 속을 움켜쥐고 매일같이 울었다. 아버지가 더 살길 원하면서도, 고통 참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고통의 수위는 점점 올라갔다. 모르핀 투약량을 늘려도 소용없었다.
“인자 그만할란다. 내 좀 죽여도. 고마 안락사 시키도.”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악착같이 붙잡고 있던 정신의 끈을 끝내 놓으셨다.
아버지는 1인 병동을
고문실로 착각했다
사방이 막힌 벽, 형광등이 달린 천장이 고문실을 연상시킨 듯했다. 아버지 몸은 병실에 있었지만, 정신은 1974년 중앙정보부 6국 지하 고문실 어딘가로 자꾸 돌아갔다.
“느그가 고문하믄 내가 당하고만 있을 거 같나?”
“아버지, 저 석이에요. 여기는 병원이고요. 제발 정신 차리세요.”
“인마들이 내를 직일라고 한다!”
2010년 7월 12일 밤 11시 30분. 아버지는 그렇게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노동과 민주화운동의 대가로 맞바꾼 국가배상금은 끝내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그게 무엇이든 아버지에게는 고문이었다. 최고의 병실에서 누워계셨지만, 고통은 아버지를 과거에 묶어 두었다.
아버지는 결국
고문실에서 죽은 셈이다
치매조차 당시 기억은 지우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임분이의 치매는 급속도로 악화됐다. 공교롭게도 국가배상금 7억 3,000여만 원을 가지급 받았던 2009년 8월 무렵부터 어머니의 치매 증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전략당 사건으로 연루된 후 취업 길이 막히자, 어머니는 악착같이 구슬을 꿰어 손가방을 만들어 팔았다. 못 먹고 못 입으면서 어렵게 네 자식을 키우셨다. 하지만 정작 돈이 생기니 쓰지를 못했다.
수억 원의 돈을 쥐었을 때는
‘어린아이’가 돼 있었다
어머니는 샴푸와 비누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치매가 심했다. 시장에서 옷과 양말을 매일 뭉텅이로 사다 놓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 옆을 늘 아버지가 지키셨는데, 아버지가 아프자 어머니는 본능처럼 아버지 옆을 지켰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그것은 문병이 아니라 면회였다. 문병하러 온 사람들이 면회자라고 착각하시고는 자꾸 빨리 가라고 성화를 부리셨다.
“야! 이 사람아, 면회 시간이 짧은데 그래 오래 붙들고 있으면 어떡하노? 내 차례니까 퍼뜩 나온나!”
임분이 선생은 치매가 걸린 후 아버지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렸다. 결혼식 사진조차 두 동강 내버리셨다. ⓒ 셜록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마저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분명 장례식까지 함께 했는데, 아버지와의 기억은 1970년대 어디쯤에서 멈춰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아버지를 애타게 찾으셨다.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아버지를 납치해 갔다“며 밤새 통곡을 하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딸 나은주(63)는 남몰래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은주의 슬픔은 늘 어머니 슬픔을 위로하느라 유예됐다.
“해가 저물었는데 느그 아부지는 어디서 술을 마시노. 왜 아직 안 오시노. 금마들이 또 잡아간 거 아니가?”
“엄마, 아부지 돌아가셨잖아요. 그만하시고 인자 집으로 들어가세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산소에 가 돌아가신 걸 확인시켜 드리면, 어머니는 비석에 적힌 이름을 한참을 바라보시더니 뒤늦게 밀려온 슬픔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셨다. 그것도 잠시였다. 돌아서면 어머니는 또다시 아버지의 죽음을 잊었다. 은주는 어머니 손을 부여잡고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또 들으면서 어머니의 슬픔을 달래야 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받은 고통의 값을 형제끼리 쓸 수 없었다. 통장이 압류되고, 운영하던 회사가 위기에 처해도 어머니가 받은 국가배상금은 온전히 어머니를 위해 써야 한다고 형제끼리 약속했다.
‘아버지 면회를 가야 한다’고 하시면, 새벽이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과거 투옥됐던 광주로, 전주로 향했다. 속옷을 바지 위에 입을 정도로 기억은 다 내려두셨지만, 어머니는 놀랍게도 면회 가는 길을 또렷이 기억했다.
치매였지만 면회 가는
길 만큼은 기억하셨다
“이병철이가 느그 아부지 쫓아내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데..”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 이전인, 제일모직 노조 활동 시절로 돌아갔다. “아부지가 회사에서 잘려 밥줄이 끊겼다”면서 자꾸 집안의 쌀독을 열어봤다. 원망의 대상도 그러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삼성의 이병철 회장으로 바뀌었다.
그다음, 어머니의 기억은 소녀 시절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태어나고 자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보따리를 짊어지고 이웃들에게 “후루이치 역으로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찾았다. 변함없이 정직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존경이었다.
“평생 아부지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았으면서 보고 싶나?”
“느그 아부지는 옳았잖아. 그렇게 착한 사람을 왜 괴롭혀가지고.. 아부지가 참 보고 싶다.
2014년 11월 21일 저녁 6시. 어머니는 그토록 보고 싶은 아버지를 따라 운명했다.
나은주(왼쪽) 나문석(오른쪽). 뒤에 보이는 집은 경매가 예정되어 있다. 이 집은 가족들이 평생 돈을 모아 산 집이다. ⓒ 셜록
아버지와 살던 집이 압류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고통은 모두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2013년 7월 국정원이 부당이득반환 청구소송을 걸면서 부모님이 겪은 고통은 자식 세대까지 세습됐다. 국정원이 나은주, 나문석, 나정수(57), 나정애(55)에게 2009년 8월 가지급받은 4억 5,000여만 원의 상당액을 돌려 달라고 한 것이다. 법원은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네 형제는 그때부터 졸지에 채무자가 됐다.
애초 부당이득 반환 원금은 형제당 2억여 원 정도였다. 하지만 연 20%에 달하는 연체이자율은 빚 덩치를 순식간에 불렸고, 현재는 그 금액이 무려 6억 2,000만 원까지 늘어났다. 4억 5,000여만 원 받았는데, 돌려줘야 할 돈이 받은 돈을 훌쩍 넘어버린 것이다. 무려 1.5배다. 문제는 상황이 계속 더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은
경매 처분될 예정이다
평생 처음 마련한 집이었다. 아버지가 투옥된 사이 형제들이 야간고등학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산 집이자, 친척들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힘써준 신부님들이 모아 준 돈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아버지를 간첩으로 조작한 당사자에게, 이 십수 년의 설움과 노력이 담긴 공간을 넘겨 줘야 하는 현실이 은주는 원통했다.
“법이란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까? 배상해 줄 땐 언제고, 집을 뺏습니까?”
문석도 절벽에 서 있는 기분이기는 마찬가지다.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문석은 통장이 모두 압류되면서 정상적인 영업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빨갱이 자식’으로 손가락질받던 어린 시절, 시에서 위로를 받던 문석은 결국 시인이 되어 책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지만, 그마저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아버지가 늘 인간답게 살아라, 폐 끼치지 말고 살아라고 했는데.. 국가는 그러질 않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아픈 아버지는 당신이 만든 ‘고문실’에서 돌아가시고, 치매 걸린 어머니는 고통뿐인 과거 속에서 돌아가시고, 그 자손들은 현재 감당할 수 없는 빚에 갖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