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수의 아들은 시인이 되었다
김수영의 시는 아버지를 닮았다. 비릿한 혁명의 피 냄새가 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김수영의 시에서 아버지가 느껴진다. 자연스레 아버지의 오랜 빈 자리를 시가 대신했다.
그리움과 원망,
가난을 시로 버텨냈고,
아들 문석은 시인이 됐다
1974년 아버지 나경일(1930년 생)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문석(60살)은 고등학생이었다. 주변은 문석과 그 가족을 철저히 밀어냈다. “지 아비 닮아서. 죽은 듯이 살 일이지“라며 빨갱이 취급을 했다. 문석은 그 때부터 책을 탐독했다.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 영향을 받아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문석의 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유신정권에 짓밟힌 가정을 시에 투영시켰다. 인혁당 무기수의 아들이 겪은 어두운 인간사가 시에 담겨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고의 시간을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가 특히 많다. 이 공간에 문석이 쓴 시 몇 개를 첨부한다.
나문석 ⓒ 셜록
어머니와 내비게이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연대기를
연두의 눈물로 부초처럼
살아낸 팔순의 어머니
칠팝십 년대 서대문, 광주, 전주로
유신의 초행길 물어물어
남편 면회하러 잘도 다니시더니
이제 문밖에만 서도 당신의 집을 찾지 못한다
잠시 햇살처럼 정신 맑아진 날
당신의 막내 동서가 보고프다고
처음 나서는 칠 백리 서천 가는 길
합천 지날 때쯤 사방을 살피다가
아직도 생생하다는 듯
여기로 쭈욱 가면 광주 아이가?
또 한참을 가다 전주 지날 즈음엔
더더욱 확신에 찬 목소리로
야야, 여기는 전주교도소 있는 데다!
글썽한 눈물 찍어내며
이 엄동설한에 너거 아부지는 잘 계시는가 모르겠다
니는 우째 이리도 길을 잘 찾노?
바늘에 찔린 듯 명치끝이 조여와 숨이 막히는데
울 어머니 너무도 태연하게 묻는다
야야, 우리 시방 어데 가는 길이고?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 들어서는 나문석 선생. 국정원의 부당이득청구로 인해 나 선생의 통장이 압류되면서 현재 출판사 운영은 어려움에 빠졌다. ⓒ 셜록
오지 않는 사월
아찔했던 슬픔의 냄새가
아직 풀풀 날리는 사월
특별한 시간보다 평범했던 날들이
더 많았던 사람들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아버지란 이름, 남편이란 이름 대신
간첩이란 이름표를 달고
아픈 역사의 주둥이를 막고
먼 세상 버리는 날
새파랗게 질린 달 아래
저 혼자 울던 바람,
40년 세월이 지났지만
분단의 벽 허물지 못한 채
꼭꼭 갇혀
거꾸로 가고 있는 민주의 하늘을 바라본다
두 눈 부릅뜬 채
잠들지 못하는 무덤의 주인들
오늘 그 빈자리를 더듬는데
분노의 열정이 미쳐 날뛰던
핏빛 산 아래 톡, 떨어지는 진眞 달月 래來 꽃잎
님들이 흘린 핏방울
공포 속에서 도망치듯 달려나온 울음들이
살아야 한다고
살아내야 한다고
긁어내던 손톱에 맺힌 恨들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풀석 주저앉은 이 무덤가에서
우리는 오늘도 오지 않는 사월을 기다립니다.
– 인혁열사 40주년(2015년 4월 9일) 추모일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