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딸 전재연(50)은 세월호 유가족을 방문했을 때 눈물을 참지 못했다.

“늦게 찾아봬서 죄송합니다. 저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딸입니다.

잿빛 입술, 헝클어진 머리. 유가족이 애써 감사의 웃음을 건넸지만, 재연은 그들의 모습에서 고통을 봤다. 위로의 말을 건넬 틈도 없었다. 유가족의 슬픔이 재연의 몸에 스며들면서 금세 눈동자가 눈물에 잠겼다. 어머니가 겹쳐 보인 탓이다.

전재연의 어머니 임인영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수가 된 아버지 전창일의 무고함을 알리고자, 10년간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어머니를 평범한 아내에서 투사로 바꿔 놓았다.

지금의 세월호
유가족처럼 말이다

재연은 세월호 유가족의 손을 꼭 움켜 쥐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면서도, 그게 최선이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힘내세요. 잘 챙겨 드시고요. 함께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때 제대로 동참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때 바로 잡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 때.’ 세월호 유가족은 되려 아버지를 포함한 15명이 간첩으로 날조돼 수감되고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4년 ‘그 때’ 제대로 동참하지 못했던 걸 미안해했다.

국가에 버림받은 고통을 알기에 서로의 존재가 힘이 됐다말 한마디 위로의 손짓 하나 역시 큰 위안이었다. ‘나라가 나라다웠다면’ ‘정의가 바로 섰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극 앞에 두 사람은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인혁당의 딸과 세월호의 어머니는 정의의 회복을 간절히 바랐다.

인혁당 피해자 아내들이 수감자 구속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행진을 하는 모습 ⓒ 4·9통일평화재단

사실 비극을 막을 정의의 순간이 있었다. 인혁당 1 사건이 있었던 1964 8, 양심 검사들이 간첩 조작 강행을 거부했다중앙정보부가 “북의 지령을 받은 국가전복 세력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뒤 사건을 서울지검에 송치했을 때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검사가 기소에 항명한 것이다.

“증언 말고는 증거 하나 없기 때문에 기소할 수 없습니다.”

서울지검장 서주연은 언성을 높였다. 그는 기소도 못하면 대대적으로 발표한 정부의 위신이 뭐가 되느냐며 따져 물었다. 그럼에도 세 검사는 굴하지 않았다. 검찰총장, 법무부 장차관 등 고위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수사 결과를 보고했다.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중앙정보부가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 자백 그대로 공소 제기해도 되지 않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

세 양심 검사는 결국 사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서주연 지검장은 기어코 당직 검사를 시켜 공소장을 써냈다. 일종의 거래였다. 서주연은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지 않아도 됐고, 당직 검사 정명래는 이 일을 계기로 차후 중앙정보부 5국 부국장 자리에 올랐다.

언론에 이 사실이 흘러 들어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당초 크게 한 건(?)하려고 했던 중앙정보부가 궁지에 몰렸다. 국회에서는 중앙정보부 폐지론까지 나왔다. 검찰은 갑작스레 사건을 축소시켰다13명만 국가보안법이 아닌 반공법으로 기소하면서 애초 발표가 틀렸음을 자인했다.

양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 뒤 바뀐 것은 없다. 양심 검사들은 인사보복으로 끝내 자리에서 물러났다. 수장들은 오히려 더 높은 자리에 올랐다.

인혁당 1차 사건 주동자들이
자리만 바뀌었을 뿐 건재했다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이었던 이용택은 중앙정보부 6국장으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는 중앙 정보부장으로, 법무부 장관이었던 민복기는 대법원장이 됐다.

세 사람은 1차 인혁당 사건 때 설움을 씻으려는 듯 2차 인혁당 사건 조작에 몰두했다.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지휘하에 민주 세력들을 잡아들여 몽둥이로 간첩을 만들었고, 민복기는 8명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1974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기자들 앞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 ⓒ 국가기록원

증거 인멸을 위해 화장까지 감행했다. 사형수 몸에 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자 유족의 동의 없이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하려 했다. 우여곡절 끝에 유가족이 받은 시신에는 실제로 고문 흔적이 역력했다. 등은 시커멓게 탔고, 손발톱은 뽑혀 있었으며, 발뒤꿈치는 움푹 파여 있었다.

하지만 사법 살인에 대한 대가는 없었다. 이용택, 신직수, 민복기의 승승장구는 뒤에도 이어졌다인혁당 사법살인을 주도한 3인은 훗날의 삶은 다음과 같았다.

사형수 이수병의 시신. 고문의 흔적이 역력하다. ⓒ 4·9통일평화재단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사법살인‘ 3

1. 이용택고문당했다는 증거 내놔라

이용택(87)은 중앙정보부 6국장을 지낸 후 국회의원이 됐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 달성에서 11, 12 국회의원을 지냈다. 공기관장도 두 번 역임했다. 1978년 대한지적공사에서, 1998년 경북관광개발공사에서 사장으로 일했다.

중앙정보부 이력은 그에게 자랑이었다. 대한민국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금의 수준에 오르기까지 중앙정보부의 역할이 크다고 회고했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사람을 고문했다는 사실을 끝내 시인하지 않았다.

고문 수사를 지시한 적도
고문의 증거도 본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당신이 고문당했다는 증거를 내놔라’고 하면 증거가 없어요. 그저 말로만 당했다는 거예요. (…) 내가 매일같이 ‘고문하지 말라’고 교육했고, 순찰도 돌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 2002년 11월 18일 이용택 오마이뉴스 인터뷰

대한민국 훈장은
세 개나 받았다

보국훈장 천수장(1967년), 국민훈장 동백장(1976년), 국민훈장 모란장(1987년)이 그것이다. 국민훈장의 경우 정치·경제·사회 등 분야에서 공을 세울 때, 보국훈장은 국가안전보장에 공을 세울 때 받는 거지만, 과연 그가 자국민에 안긴 득과 실 중 어느 것이 더 큰지는 따져볼 문제다.

놀랍게도 그는 현재 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다. 이 단체는 일제강점기 시절 멀리 외국으로 끌려 간 동포들을 위로하고자 해외에서 위령제를 연다. 물론 그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라는 사실만 빼면 사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국장으로 일한 중앙정보부 6국은 간첩 조작의 산실임은 부정할 없다.

2. 신직수, 법비(法匪) 김기춘을 발굴하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기자회견 당시 모습 ⓒ 국가기록원

신직수(1927년 출생)는 박정희 정권에서 기용된 역대 최연소 검찰총장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6살이었다. 그는 무려 7년 반 넘는 세월 동안 검찰 수장 자리를 지켰다. 검찰총장직에서 내려온 이후에는 법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연달에 올랐다.

오랜 기간 박정희의
오른팔을 자처했다

신직수 라인을 고스란히 따라간 것은 김기춘(78)이다. 정수장학회 1 출신 김기춘은 신직수의 눈에 띄어 유신헌법 뼈대를 만들었다. 그 뒤 초고속 승진과 함께 빠르게 신직수를 닮아갔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에 오른 후 신직수 체제보다 더한 간첩 조작 사건을 꾸몄다.

신직수 또한 이용택처럼 많은 대한민국 훈장을 받았다. 화랑무공훈장(1953년), 보국훈장 천수장(1963년), 청조근정훈장(1969년), 보국훈장 통일장(1976년), 중화민국 특종국민대수운휘훈장(1976년) 등이다. 2001년 9월 9일 세상을 뜬 그는 국립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에 잠들어 있다.

3. ‘친일파 아들민복기, 현충원에 묻히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복기 전 법무부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는 모습 ⓒ 국가기록원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민복기는 박정희 유신헌법을 유지한 법관이었다. 인혁당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해 8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데 큰 일조를 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된 뒤 대법원장에 올랐고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장수 대법원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대표적인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민병석은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 당했을 때 궁내부대신 조문단의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올 정도로 일본 제국과 가까웠다. 민복기는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 경성제국대학 법과에 입학했고, 후에 경성지방법원 등에서 일했다.

그는 대법원장 퇴임 이후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으로 선출돼 8년간 일했다. 1986년에는 헌정제도연구위원장을 역임했다. 보국훈장 국선장(1963년), 청조근정훈장(1969년), 국민훈장 모란장(1978년) 등의 훈장도 받았다. 2007년 7월 13일 세상을 뜬 그는 현충원에 안장됐다.

애국열사들과 현충원에 나란히 묻혔다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고 있는 가족들 모습 ⓒ 4·9통일평화재단

법원은 부당한 판결을 내렸을까

기세를 떨치던 사법살인 3인조와 달리 인혁당 피해자들의 삶은 1974년 사건이 벌어진 그때에 멈춰 있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2011년 1월 대법원이 인혁당 유기수 무기수 피해가족 77명에게 ‘손해배상금 지연 이자가 과다하다며 가지급 받은 금액 일부를 돌려 달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국정원은 숨통을 더 조여왔다. 2013년 7월 국정원은 부당이득 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승소한 국정원은 반환금은 물론이고 그 금액에 매년 20% 달하는 연체이자를 인혁당 사건 피해 가족들에게 물리고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 일부는 이 돈을 갚았다. 하지만 사정이 어려운 이들의 통장은 압류됐고, 집은 경매에 넘겨진 상태다.

대법원의 판결은 불법행위가 벌어진 장기간의 세월이 흘렀고 사이 상당한 통화 가치 변동이 생겨 지연이자를 모두 없다는 식의 논리였다. 장기간의 세월이나 상당한 통화 가치 변동의 기준은 없다. 추상적인 말로만 설명했을 뿐이다.

법원 판결에서 찜찜한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법원은 파기환송이 아닌
파기자판을 했다

대법원은 특별한 언급없이 ‘이 법원이 직접 재판하기 충분하다’는 말로 피해자들이 사실심에서 위자료액을 다시 다툴 기회를 박탈했다. 원심으로 다시 사건을 돌려보내 다시 심리하도록 하는 ‘파기환송’ 결정을 내리지 않고,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스스로 재판하는 ‘파기자판’을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형평성 문제를 낳았다. 6·25 전쟁 때 좌익으로 몰려 총살당한 울산보도연맹 사건의 경우, 유가족들은 파기환송심을 통해 삭제된 지연 이자액만큼의 위자료를 올려 받았다.

1심 때 피해 당사자 기준 ‘원금 2,000만 원 이자 6,000만 원’ 판결이 났는데, 파기환송심을 통해서 60년 치 지연 이자를 못 받는 대신 원금을 8,000만 원으로 올려 받으면서 보전된 것이다.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은 이런 이런 기회조차 못 얻었다. 위자료액 청구에 대해 피해 당사자들의 말할 권리는 원천 봉쇄됐다.

대법원은 판례를 변경하면서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않았다

본래 손해배상 지연손해금의 기산점을 불법행위 성립일로 보는 것은 대법원의 오랜 판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인혁당 사형수 가족 국가배상 판결만 해도 불법행위 성립일인 1975년부터 지연이자가 계산됐다.

설령 판례를 바꿔 판결을 내리더라도 문제다. 기존 판례를 변경할 때는 대법관 14명 전원이 모여 판결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건의 경우 종래 인정되지 않던 예외를 새롭게 설정하면서 전원합의체가 아닌 소부에서 판단했다. 분명 부당하고 위법한 일이다.

왼쪽부터 강창덕, 전창일, 이창복. 이 세 사람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무고하게 투옥됐다. ⓒ 셜록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의 옷깃에는 늘 노란 리본이 붙어 있다. 그런다고 압류된 통장이 풀리고, 경매에 부쳐진 집이 ‘없던 일’이 될 리 없다.

이들은 분명한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고통이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문제를 바로 잡지 않으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을, 인혁당 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경험으로 잘 안다.

인혁당 사건은 여전히 어두운 과거에 묶여 있다.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을 제대로 위로하지 않으면 사법정의와 과거사 정리는 지연될 수밖에 없다.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2 3 인혁당 피해자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바로 당신이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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