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벼가 일렁이던 1972년 9월 27일, 강원 춘천시 우두동의 한 논두렁에서 9살 여자 아이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이가 신던 슬리퍼는 사건 현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팬티와 반바지는 논 가운데에서 발견됐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빗과 연필도 나왔다. 주머니에는 만화방 텔레비전 시청할 수 있는 쿠폰이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누군가 아이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성폭행 당한 뒤 죽은 것이 분명했다. 다리 쪽 풀잎 위에 혈흔의 있었고, 음모(陰毛)가 아이의 몸과 주변 곳곳에서 발견됐다. 아이 목에 남은 상처는 보는 이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목을 조른 흔적이었다.
‘만화방으로 텔레비전 보러 간다고 나간 아이가 반나절도 안돼 죽어서 돌아오다니.’
조용하던 동네는 일순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의 배경이 특이했다.
죽은 아이는
파출소장 딸이었다
“10월 10일까지 무조건 잡아와!”
김현옥 당시 내무부 장관은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감히 누구를’ 괘씸죄를 작용한 것이다. 김 장관은 경찰들에게 “못 잡으면 담당자를 문책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때부터 경찰들은 열일 제쳐 두고 파출소장 딸을 죽인 놈을 찾으러 다녔다.
경찰의 ‘레이더망’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만화방 주인이었다. 주검에서 만화방 쿠폰이 발견됐고, 아이는 집을 나서며 만화방에 간다고 했었다.
“정원섭 씨, 그 날 그 아이 만화방에서 봤소?”
“글쎄요. 못 본 거 같은데요?”
정원섭(현재 83세. 당시 38세)은 경찰의 질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이 몸에서 나온 만화방 쿠폰은 자기 가게의 것이 아니었다. 알리바이를 증명할 사람도 많았다. 사건 무렵 정원섭은 동네 주민 둘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아내 이창임도 만났다. 술을 마시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어떻게 가게를 어린 아들에게 맡기고 술을 마시러 가느냐”며 아내에게 군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시한부 검거령’ 마감일이 다가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10월 7일 경찰이 정원섭을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경찰은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원섭을 때리기 시작했다. 밥은커녕 잠도 재우지 않았다. 책상 사이에 봉을 끼우고 거기에 몸을 대롱대롱 매다는 일명 ‘통닭구이’ 고문을 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했다. 대답을 못하면 힌트를 주며 원하는 말을 유도했다.
“네 놈이 그 아이 욕 보이고 경황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빗이랑 연필 흘린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고문은 너무나 쉽게, 원섭을 ‘파출소장 딸을 겁탈하고 죽인 놈’으로 만들었다. 그것도 단 사흘 만에.
정원섭 선생이 자신이 수감됐던 옛 서울 구치소(현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고 있다. ⓒ 셜록
‘살인의 추억‘ 증거 조작은 실화다
경찰이 내민 증거는
자석처럼 모두 정원섭을 향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이 대표적이다. 사건 최초 목격자 이종석(가명)은 시신 발견 당시 “연필은 누런 빛깔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원섭의 아들 재호 또한 “경찰 조사 당시 본 연필은 노랗고 짧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필 모양이 달라졌다. 길이는 길어졌고, 색은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바꿔치기 된 연필은 아들 정재호(현재 54세 · 당시 9세)의 것이었다. 경찰은 원섭의 아내에게 “아들의 필통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후로 증거품 연필이 재호의 것으로 뒤바뀌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원섭이 아들의 연필을 가지고 있다가 사건 현장에 흘렸다”라고 주장했다. 마치 제 물건인 양 경찰이 마음대로 증거를 위조한 것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빗이 원섭의 것이라는 주장은 더 터무니없다. 원섭은 대머리에 가까웠다. 벗겨진 머리의 원섭에게 빗은 거의 필요 없었다. 압수된 팬티도 경찰이 조작한 작품이다. 맨 처음 경찰이 원섭의 팬티를 검사했을 때 별다른 흔적은 없었다. 나중에 경찰이 압수해 간 팬티에서는 희미한 피 얼룩이 생겨나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묻힌 것처럼.
과학수사 따위는 없었다. 음모의 주인을 확인하는 방법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DNA 검사가 아닌 ‘모양’을 감별했다. 모질, 길이, 색깔 등으로 음모 주인을 추측했다.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스무 명 정도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사체에서 발견된 음모와 용의자들의 음모를 비교한 결과 절반은 유사하고 절반은 상이하다”는 의미 없는 결과를 내놓았다.
불리한 증거인
혈액형 결과는 숨겼다
1972년 당시 DNA 검증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지만, 혈액형 대조는 가능했다. 국과수는 “감정 결과 아이 주검에서 발견된 음모 주인 혈액형은 A형, 원섭의 혈액형은 B형으로 확인됐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경찰에 회신했지만, 이 내용은 경찰 조서에서 빠졌다. 원섭의 무고함을 알릴 핵심 증거는 그렇게 은폐됐다.
정원섭 선생이 수감동 밖을 보며 상념에 잠겨있다. ⓒ 셜록
경찰은 어떻게든 정원섭을 ‘그럴 만한 놈’으로 만들려고 애썼다. 만화방에서 일하는 10대 소녀들을 상대로 그 일을 진행했다. 경찰은 17살 김주희(가명)와 14살 추선주(가명)를 여관방에 감금한 후 따귀를 때려가며 “원섭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허위 증언을 하라고 협박했다. 결국 두 소녀는 거짓말을 했다. 김주희는 그 죄책감에 우울증 약을 한 움큼 삼켜 자살을 시도했다.
“그 놈이 네 몸에도 손을 댄 거 아니야. 아주 오랫동안. 그치? 왜 기억을 못해!”
“(울음) 정말 성폭행 당하지 않았어요.”
“집에 가기 싫어? 말할 때까지 여관방에서 못 나갈 줄 알아. 이X아.”
검사는 더 했다. 당시 담당 검사였던 정용식 춘천지방검찰청 검사는 참고인 셋을 위증죄로 구속했다. 범행 입증에 반대되는 증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최초 목격자 이종석도 이 중 한 명이었다. 사건 목격 직후 ‘노랗고 짧은 연필’을 봤다던 이종석은 구속이 되자마자 “자신이 본 것은 사실 파란 것”라며 증언을 번복했다. 검찰의 으름장이 먹힌 결과였다.
법원은
‘눈뜬 장님’이었다
춘천지방법원은 끝내 정원섭에게 강간치사죄를 적용하고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상고심이 진행됐지만 결과는 같았다. 법원은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경찰의 위법 수사를 확인할 기회가 세 번이나 있었지만 늘 묻혔다. 원섭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파렴치한 놈’ 낙인을 달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무기징역’ 선고.. 고문 수사관에게 ‘장관 표창’
내무부 장관은 ‘성공적인 작전’이라며 포상했다. 수사 경찰 3명에게 1계급 특진과 장관 표창을 선사했다. 경찰이 원섭을 사건의 범인이라 발표한 날로부터 불과 사흘이 흐른 때였다. 원섭이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도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검찰에 사건을 송치하기 전이었으니 재판이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원섭은 억울함에
죽고 싶었다
한국신학대학교에서 목회를 배웠고, 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치던 그였다. 원섭은 자신의 명예를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여기고 식음을 전폐했다. 몸무게는 금세 65kg에서 45kg로 줄었다. 하지만 목숨은 원섭의 생각보다 질겼다. 피가 나도록 머리를 시멘트 벽에 들이받고,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으려 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원섭은 유치장에 있을 당시 날마다 경찰의 고문 수사 사실을 종이에 기록했다. 일종의 수난 일기다. 원섭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가방 밑창을 뜯어 수난 일기를 숨겼고, 이를 아내에게 몰래 건넸다. 언젠가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날이 오리라 믿었다. 실제로 이 일기는 훗날 재심에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옥 같던 수감 생활이 끝나고, 1987년 12월 24일 원섭은 석방됐다. 감옥에 들어간 지 15년 2개월 7일 만이었다. 원섭은 모범수로 인정받아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진실을 밝히기까지 12년 세월이 더 필요했다. 원섭은 1999년 11월에 재심을 신청했다. 하지만 2003년 12월 기각 결정이 확정되면서 첫 번째 재심 싸움은 무기력하게 끝났다.
두 번째 싸움은 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7년 11월 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결정’을 내렸고, 대법원은 2011년 10월 재심을 신청한 원섭에게 드디어 무죄판결을 내렸다.
시국 사건이 아닌 형사사건이
재심으로 무죄가 나온 첫 사례였다
그 뒤 형사보상 결정까지 순탄하게 진행됐다. 2012년 5월 18일 춘천지방법원은 “억울한 옥살이를 한 대가로, 국가는 원섭에게 9억 6000여만 원의 돈을 지급하라” 보상결정을 내렸다.
형사보상
형사상의 재판절차에서 억울하게 구금 또는 형의 집행을 받거나 재판을 받느라 비용을 지출한 사람에 대하여 국가가 그 손해를 보상해 주는 제도
하지만 정작 보상금 지급은 지지부진했다. 보상금을 네 차례에 걸쳐 끊어서 줬다. 보상 결정 한 달 뒤인 6월 8일에 처음 지급하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10월 19일에 원섭은 비로소 나머지 형사보상금 전부가 지급됐다.
정원섭 선생은 기소당한 후에도 고문 경찰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 셜록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아내, 아버지를 죄인으로 증언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
원섭은 그나마 형사보상금을 통해 옥살이에 대한 대가를 조금이나마 보상받았지만, 가족들은 아니었다. 원섭이 교도소에 있을 때 가족들은 동네 사람에게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15년 넘는 세월 동안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가족들이 받은 상처와 명예회복을 위해서 원섭은 다시 싸워야 했다.
원섭은 가족들의 무너진 삶에 대한 대가를 받고자 2012년 11월 28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형사보상 이후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보통의 순서였다.
손해배상
공무원이 고의나 과실로 위법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그 배상책임을 지는 제도
26억 원, 소송 제기 ‘열흘’ 늦어 못 준다
바라는 바대로 다행히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정원섭의 가족이 이겼다. 서울중앙지법은 2013년 7월 15일, 정원섭의 가족 6명에게 총 26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여러 일이 잘 풀리는 듯했다. 때마침 원섭을 모티브로 한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개봉하면서 원섭의 삶이 재조명됐다. 원섭은 기뻤다.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비극은 그 후 다시 시작됐다.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졌다.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이 지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에 모두 기각한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형사보상결정을 확정 받은 날짜는 2012년 5월 18일, 그 후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날짜는 2012년 11월 28일이었으니 딱 ‘열흘’ 차이 때문에 배상금을 받을 자격을 상실했다고 법원은 설명했다.
시효 열흘 늦어
26억 원 지급 안돼
법원이 근거로 내세운 판례는 2013년 12월 12일에 선고된 ‘김상순 간첩 조작 사건(2013다201844)’ 대법원 판결이었다. 김상순(당시 27살)은 1983년 7월 대구 보안부대 수사관들에 끌려가 고문 끝에 가짜 간첩으로 몰려 징역 12년 자격정지 12년을 선고받았다. 천신만고 끝에 김상순은 2013년 12월 12일 국가로부터 손해배상금 확정 판결을 받긴했지만, 판결문에 쓰인 손해배상청구의 소멸시효 기간은 확 줄어들었다.
그 전까지는 원래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3년’ 내에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하면 됐다. 하지만 이 때부터 ‘3년’이 ‘6개월’로 바뀌었다. 쉽게 말해, 형사보상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손해배상청구를 할 경우에만 ‘국가책임’을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법원 설득될만한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바뀐 판례에 따라 원섭은 손해배상 기한을 놓친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됐고 26억 원은 못 받는 돈이 됐다.
정원섭 ⓒ 셜록
황당한 것은 손해배상청구를 한 후에
판례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원섭이 손해배상을 청구한 날은 2012년 11월 28일, 그리고 서울고등법원이 근거로 내세운 판례가 선고된 날은 2013년 12월 12일이었다. 즉‘미래에 바뀔 판례를 대비해 원고가 일찍 소송을 청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법원이 책임을 물은 것이다.
누구든 소송을 준비할 때는 그 때까지의 판례를 참고한다. 원섭 또한 형사보상과 손해배상 사이에 통상 3년의 여유기간이 있었으니 그에 맞춰 소송을 준비했다. 하지만 소송 중간에 판례가 바뀌면서 모든 권리가 날아갔다. 어느 누구도 예상 못한 법원의 ‘제멋대로 행보’다.
사실 형사보상금을 다 받은 날로부터 따져 계산하면 손해배상 청구를 40일 만에 신청한 것이다. 원섭은 보상금을 다 받는 데 약 5개월이 걸렸다. 2012년 5월에 형사보상 결정이 나긴 했지만, 원섭은 6월 8일, 6월 21일, 6월 29일, 10월 19일 총 네 번에 걸쳐 보상금을 나눠 받았다.
‘형사보상’ 지급이 늦어지면
그만큼 ‘손해배상’ 소송도
늦어지기 마련이다
형사보상 결정이 나도 ‘그 돈을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몇 번에 걸쳐 받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빚을 내서 손해배상청구 소송 인지대를 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사정과 관계 없이 법원은 형사보상 결정일로부터 6개월 내에 무조건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한다고 판례를 변경했다.
‘피고 대한민국이 책임이 없다고 하니…’ 이번에는 당시 고문했던 수사관, 검사, 법관을 상대로 다시 손해배상청구를 했다. 45년 전 벌어진 일이라,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 자손들이 재판에 대신 참석했다.
이는 1심에서 일부 인용됐지만 다시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힘겨운 싸움을 몇 번씩 거듭하고 있다.
정원섭 ⓒ 셜록
유엔기본원칙 “인권침해에는 시효 적용 안 된다”
2013년 12월 12일 바뀐 판례 탓에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에 계속해서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시절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또 고통을 받고 있다.
‘수십년 동안 온갖 박해를 다 받았는데 고작 며칠, 몇 달 늦었다고..’
‘소멸시효 6개월’ 때문에 수십억 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못 받은 사례는 ‘조총련 간첩 조작 사건’ ‘진도 일가족 간첩 조작 사건’ ‘송 씨 일가 간첩단 조작 사건’ 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현재 이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지휘봉은 헌법재판소가 쥐고 있다. 많은 변호인들이 이와 관련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헌법재판소에는 현재까지 결정나지 못한 채 관련 소장이 잔득 쌓여있다.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과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헌법 제6조 1항에 따라 유엔기본원칙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하지만 왜 우리나라는 고문, 감금 등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시효를 없애지 못할지언정 3년도 아닌 6개월이라는 시효로 짧아진 것인가?
이제 헌법재판소가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