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전화를 받고, 그 남자가 조른 목 부위가 다시 욱신거렸다.
“김보경 씨, 1월 17일에 청량리 청과시장 가셨죠? 최OO 씨가 당시 양육자 강하나(가명) 씨와 동행한 여자 기자(김보경 지칭)도 명예훼손, 모욕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그날 벌어진 일을 생각했다. 아이와 부인을 향해 칼을 든 가정폭력 가해자이면서, 이혼 후에는 8년간 양육비를 주지 않은 남자 박OO(83년생) 씨.
그날 박 씨는 한 기자의 손가락을 부러뜨렸고, 내 목을 졸랐다. 전 부인도 거리에서 거침없이 때렸다.
이번엔 박 씨의 엄마 최OO 씨가 나서 전 부인과 기자를 고소했다. 양육비도 안 주면서 전 부인을 때리는 마흔 무렵의 아들, 그 아들이 외면한 손녀를 홀로 키우는 며느리를 고소한 시어머니. 이로써, 막장드라마에서도 보기 어려운 최악의 배드파더스 가족이 탄생한 듯했다.
최 씨가 3월 27일 동대문경찰서에 제출한 고소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강하나(가명)는 본인 영업장에서 본인 아들(박OO)의 범죄 경력을 큰소리로 외쳤으며 본인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 명절 전이라 (시장에)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그 내용을 알려 (본인은) 명예훼손과 모욕을 당했다.”
“강 씨가 본인에게 심한 욕설을 했다”는 최 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배드파더스 난동’ 현장 영상과 녹취록을 확인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 해보았다.
사건 당일인 1월 17일 오후 2시, 동대문소방서 주최로 ‘전통시장 전문 의용소방대 발대식’이 서울 청량리의 모 시장 박OO 씨 가게 앞에서 열렸다. 동대문소방서로부터 의용소방대원 명패를 받은 박 씨는 가정폭력 가해자이자, 양육비를 안 주는 배드파더스였다.
그는 2012년 12월부터 매달 60만 원씩 양육비를 지급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약 8년간 무시했다. 그가 지급하지 않은 양육비는 2020년 1월 기준 약 5000만 원이 넘었다.
박 씨의 전부인 강하나(83년생. 가명)는 양육비를 받기 위해 그의 일터인 서울 청량리 청과시장을 찾았다. 이 사안을 취재하던 SBS CNBC 기자와 <셜록> 기자인 나도 현장을 동행했다.
박 씨 가게에 도착했을 때, 명패 수여식이 진행 중이었다. 동대문소방서 관계자와 의용소방대원으로 현장은 북적였다.
박 씨의 가게 출입구 오른쪽, 흰색 천으로 덮인 의용소방대원 명패를 공개하기 직전, 강 씨가 소리쳤다.
“박OO 씨 듣고 싶습니다! 너, 왜 양육비 안 줘!”
당황한 박 씨는 팔로 강 씨를 밀쳤다.
“병X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강 씨는 뒤로 밀리면서 박 씨에게 외쳤다.
“병X 같은 소리? 너! 가정폭력범이잖아! 이런 사람을 상을 준다고요?”
박 씨는 강 씨에게 상해를 입힌 혐의로 징역 8월-집행유예 2년을 2014년에 선고받았다. 이혼 판결을 내린 서울가정법원은 2015년 박 씨를 유책배우자로 인정했다.
박 씨는 “밀린 양육비를 달라”며 다가가는 강 씨에게 또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니가 니 새끼 키워라! 이 씨XX이, 진짜. 내가 돈이 X나 많아도 너한테 양육비 안 줘 이 XX야!”
박 씨의 다음 표적은 기자들이었다. 그는 현장을 촬영하던 SBS CNBC 기자의 몸을 잡고 들어올려 외삼촌이 운영하는 옆 가게 쪽으로 끌고 갔다. 그의 가게에서 외삼촌 상점까지는 약 15걸음 정도다. 박 씨는 SBS CNBC 기자의 카메라를 손으로 잡아 빼앗으려 했다.
같은 시각, 강 씨는 현장에 있던 김현 동대문소방서장에게 “박 씨가 양육비 미지급자인 줄은 알고 명패를 주느냐”고 항의했다.
박 씨가 본인 가게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강 씨는 그의 행방을 시어머니인 최 씨에게 물었다. 박 씨는 모친 최 씨와 함께 과일 가게를 운영한다.
“박OO이 어디갔어요. 본인 아들이잖아요!”
아들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동조해 온 최 씨는 오히려 강 씨에게 화를 냈다.
“너가 찾아봐라. 왜 니가 나 보고 찾으라고 하는데? 니 나한테 행패 부릴 자격 있냐고!”
이혼 전에는 가정폭력을, 이혼 후에는 양육비 문제를 방관하는 시어머니가 “자격”을 운운하자, 강 씨는 화가 났다.
“본인이 (박 씨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를 방관하면서) 도와주고 있잖아요! 내가 왜 (자격이) 없어? 너 맨날 우리 집에 와서 밥 먹었잖아? 내가 밥 차려 주고!”
“웃기고 있네. (시)부모 안 모신다고 집까지 나가 놓고, (지금) 누가 행패야!”
2012년, 강 씨는 전 남편의 가정폭력을 피하기 위해 약 6개월 간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서 숨어지냈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시어머니 최 씨의 말에 강 씨는 참았던 화를 풀어냈다.
“뭐? 내가 (시부모를) 안 모신다고? 니 아들 가정폭력으로 나 집 못 살아서 나온 거야! (중략) 니네들이 (나한테) 무슨 짓 했는데? 가정폭력, 뭐? 그렇게 맞았는데도 파스 붙이면 낫는다고? 니 자식이 맞았는데 그럴 수 있나 보자. 가정폭력으로 집행유예 2년 받고, 징역 8개월! 내가 판결문 갖다 줘? 어디다 뭐? 집을 모시기 싫어서 나갔다고?”
두 사람의 다툼과 대화는 여기까지. 이를 근거로 최 씨는 명예훼손, 모욕 혐의로 강 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최 씨는 본인과 강 씨의 말다툼 모습을 촬영한 나도 명예훼손 및 모욕죄 혐의로 고소했다. <셜록>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양육비 외면하는 배드파더스” 기획 영상도 문제삼았다.
해당 영상에는 8년 째 양육비를 미지급한 ‘배드파더’의 모친으로 최 씨 모습이 담겼다. 작년 12월 양육비 미지급자 박 씨의 반론을 듣기 위해 가게로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다. 대신에 그의 모친이 기자에게 인터뷰 거절 의사를 밝혔다.
“기자님, 왜그러세요. 인터뷰 안한다는데. 뭘 무슨 입장을요. 우리 입장은 생각을 안 하세요? 싫다고요! 기자, 방송국하면 내 입에서 욕이 다 나와.”
영상에서 최 씨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됐고, 가게 위치나 이름도 특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최 씨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이용해 자신과 아들의 문제 행위를 지적한 양육비 미지급 피해자와 기자를 고소했다.
아들 박 씨가 당시 현장에서 전 부인과 기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최 씨는 알고 있을까?
강 씨는 전 남편 박 씨의 외삼촌에게 뺨을 맞았다. 박 씨는 강 씨의 휴대전화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강 씨는 박 씨의 폭행으로 뇌진탕과 어깨, 팔꿈치 타박상 진단 받았다.
SBS CNBC 기자는 박 씨에 의해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꺾여 부러졌다. <셜록> 기자인 나는 왼쪽 손가락 찰과상과 출혈로 치료를 받았다. 박 씨에 의해 졸린 목 부위는 염좌 진단을 받았다.
동대문경찰서는 지난 14일, 폭행죄 등의 혐의로 박 씨를 기소 의견으로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강 씨는 최근 기자를 만나 “양육비도 안 주고 아이도 만나주지 않은 전 남편이 시어머니를 앞세워 나를 고소를 해 몹시 황당하다”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자녀가 등교도 못하는 상황인데, 폭행 피해자인 내가 시간을 쪼개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씨는 전 부인-기자 폭행 사건 이후, 동대문소방서에서 의용소방대원 면직처리됐다. 그의 가게에 걸린 ‘전문 의용소방대원 명패’ 역시 수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