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어떤 모습이 주인을 닮아가듯이, 사물과 사람이 한몸처럼 겹쳐 보일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문짝 떨어진 오래된 사물함과, 상체가 끈으로 꽁꽁 묶인 채 법정에 선 허선윤 전 영남공고 이사장. 둘은 다른 존재지만, 질긴 인과관계로 연결돼 있다.
몰락한 사립학교의 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 하늘색 수의, 회색 끈으로 묶인 몸. 구속 6개월은 허선윤의 몸에서 ‘왕년의 위세’ 지워버렸다.
그래도 내면의 고집은 여전했다.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된 그에게 대구고법 제1형사부 남근욱 판사는 지난 5월 28일 이렇게 선고했다.
“교사채용과 관련해 돈을 수수해 상대적으로 높은 청렴성이 요구되는 학교 기관의 업무처리에서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현저히 손상시킨 경우로 죄책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2심에서도 범행을 반성하지 않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합니다.”
피고인 허선윤은 “선고 이후 7일 이내 상고를 할 수 있다”는 재판부의 안내가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버렸다. 그는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허선윤 전 이사장이 구속된 작년 11월 즈음부터 지금까지, 영남공고 교직원 100여 명은 “피고인을 강하게 처벌해 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세 차례나 법원에 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이미지는 백 마디 말보다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피고인 허선윤의 항소가 기각된 그즈음, 영남공고 A 교사는 기자에게 사진을 한 장 보냈다.
박물관에 어울릴 법한 오래된 사물함이었다. 윗면은 페인트가 벗겨져 녹슨 철제가 드러났고, 문짝은 검정 얼룩과 스티커 자국으로 지저분한 사물함. 그나마도 문짝이 온전하면 다행으로 보였다.
이 사물함은 박물관이 아닌 영남공고에 설치돼 있다. G11에 초대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떤 학생들은 이런 사물함을 사용한다. 이마저도 넉넉하지 않다. A 교사는 낡은 ‘사물함의 내력’을 설명했다.
“기자님, 사물함 문짝에 네모난 이름표 자국이 왜 두 개씩 있는 줄 아십니까? 사물함이 모자라 학생 2명당 하나씩 나눠 써서 그렇습니다. 사물함 상태를 보십시오. 30대 중반인 제 고등학교 시절에도 사물함이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한 학급당 평균 학생 수 24명보다 사물함 개수가 모자란 상황. 영남공고 학생들은 저 낡고 허름한 사물함을 2~3명이 나눠 쓴다. 이 사물함 가격은 개당 약 3만 원이다.
영남공고 학생들이 이 사물함을 사용한 기간만 대략 15년. 2005년부터 교장직을 맡아 2014년 이사장에 오른 허선윤 전 이사장의 이력과 고스란히 겹친다.
그나마 사물함 공유는 나은 편에 속한다. ‘사물함 구하기’는 거의 전쟁이다.
영남공고 교사들은 종종 학교 창고 옆 공터를 찾는다. 사물함 등 학교에서 버린 철제물을 모아두는 장소다. 교사들은 공터를 뒤져 다른 반에서 버린 사물함 중에 그나마 사용할 만한 물건을 찾아 다시 반으로 주워온다.
올해 4월, 교직원 5명은 1톤 화물차를 빌렸다. 이들은 “사물함을 내놓았다”는 주변 학교의 공고를 보고, 대구에 위치한 OO초등학교에서 사물함 180개를 수거해왔다. 이미 초등학생들이 약 10년간 사용하고 새 사물함으로 교체하고자 내놓은 물건이었다.
이렇게 영남공고 학생들은 누군가 쓰다 버린 사물함을 주워다가 쓰고 있다. 매년 약 80억 원의 정부지원금이 투입되는 영남공고는 왜 이런 사물함을 사용한 걸까.
“학교에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교육청이 지원하는 교부금을 학교가 자체적으로 집행하면 사물함은 충분히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왜 이걸 안 했을까요?”
B 교사는 한 사람을 지목했다.
“모든 건 허선윤 이사장의 지휘대로 움직였습니다. 교사들이 수차례 사물함을 전면 교체해달라고 건의했지만, 윗선에서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허선윤 이사장이 학교에서 가장 꼼꼼하게 챙긴 건 학생 교육도, 교사들의 노동 환경도 아닌 ‘돈’입니다.”
허선윤 전 이사장은 학생 사물함 비용을 집행하지 않았지만, 체육 교사 운동복 예산 수백만 원으로 자기 골프 의류를 사 입은 인물이다. 교사들이 사물함 교체를 수년간 건의할 동안, 그는 특정 식당에 교사들을 동원해 10년간 세금 약 1억2570만 원을 썼다.
이뿐만이 아니다. 설립 70년 전통의 영남공고는 아직도 교내에 상수도가 설치되지 않았다. 교내 화장실과 실습장은 지하수를 끌어다가 사용한다. 급식소와 운동장 근처에 설치된 수돗가만 수돗물을 이용한다.
학생 건강과 위생을 위해 존재하는 보건실에도 수돗물은 나오지 않는다. 보건실 내부 수도꼭지와 식수 컵에는 하얀 석회 가루가 묻어 있다. 반면, 허선윤 전 이사장이 주로 사용하던 체육관 내부 샤워실에는 상수도가 설치되어 있다.
보건실과 일부 실습장은 올해 상수도가 설치될 예정이다.
허선윤 전 이사장은 수업도 엉망으로 만들었다.
영남공고 학생들은 미술 교사가 사비로 사 온 재료를 활용해 수업을 받았다. 고교 교육에서 주로 사용하지 않는 색연필과 사인펜을 활용한 회화 수업이다. 이마저도 스케치북 재고가 충분하지 않아 명수대로 한 장씩 찢어 그림을 그려야 했다.
“허선윤 이사장 시절 학교 고위직들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 등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퇴직한 미술 선생님은 본인 사비로 미술 재료를 사 와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학교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 C 교사의 말이다.
국가는 모든 학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직업계 고등학생이라고 문짝 떨어진 사물함을 쓰고, 석회 가루 섞인 물로 양치질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허선윤이 교장-이사장으로 있던 시절에 영남공고 학생들은 심한 배제, 차별을 겪었다. 관리 감독 책임이 있던 대구교육청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요즘 영남공고 교장, 교사, 새로 구성된 이사회는 허선윤의 흔적을 지우는 ‘학교 바로 세우기’에 노력하고 있다. 모두 학생들을 위한 일이다.
대구교육청은 최근 좋은 교육을 실천하는 ‘2020 아름다운 선생님’을 관내에서 선정했다. 고교 교사는 네 명 선정됐다. 이 중 두 명이 영남공고 교사다.
학교는 조금씩 좋아지는데, 감옥의 허선윤은 여전하다. 그는 지금도 무죄를 주장하며 지난 1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역시, 사물함 교체보다 사람 마음 바꾸는 게 훨씬 어렵다.
어떤 공간과 사물은 거기에 깃든 사람을 은유한다. 저 초라한 사물함은 허선윤이 학교에서 어떤 교육자로 살았는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