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성취도가 낮고, IT 분야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모자라, 금융권 준비 노력이 부족하면 어떤가. 여기에 학점이 3.0이 미만이어서 아예 자격미달이면 또 어떤가.
할아버지도 아니고 작은할아버지가 있는데 말이다.
부모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닌, 작은할아버지를 잘 만나서 신한은행 정규직이 된 사람이 있다. 특혜를 누리는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작은할아버지가 조카손자의 지원 사실을 조용병 신한은행장에게 알렸고, 그는 다시 아랫사람에게 지시했다. 이후 일처리는 일사천리였다.
작은할아버지가 힘 좀 쓰자, 나아무개 씨는 특이한 방식으로 채용 관문을 ‘프리패스’ 했다.
그의 작은할아버지는 라응찬 전 신한은행장이다. 라 전 회장은 1991년 신한은행 은행장 자리에 오른 후 행장 3연임에 성공한 인물이다. 2001년에는 신한금융지주사 초대회장에 올라 이후 10년을 이끌었다.
그의 조카손자인 나 씨는 성적-노력-자격이 다 안 됐지만, ‘가족‘이라는 강력한 스펙이 있었다. 서류전형에서 탈락 위기에 처한 그가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면 2016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한은행은 2016년 하반기 신규행원 채용공고를 그해 9월 9일에 게시했다. 특별 전형 등을 제외한 일반직 240명 채용을 예고했다. 채용부문은 일반직과 IT 분야로 나눠졌고, 응시 자격은 연령-학력-전공 제한이 없었다.
채용 과정은 서류전형-실무자 면접-임원 면접 순으로 총 3단계로 진행했다. 이 공채에 약 1만6000명이 지원했다. 라응찬의 조카손자도 그 중 한 명이다.
라응찬 전 회장은 조카손자가 신한은행을 지원한 2016년 9월께 조 행장에게 말했다.
“조카손자인 나OO이 신한은행 채용에 지원했으니 잘 봐주게나.”
라 회장은 신한은행 근무 시절 조 행장의 상사였다. 청탁을 받은 조 행장은 신한은행 본사에서 이승수 당시 신한은행 인사부장에게 지시했다.
“라응찬 전 회장님 조카손자 나OO의 전형별 합격, 불합격 여부에 대해 피드백 줘.”
이 부장은 나OO을 ‘특이자’ 명단에 등재하고, 得(얻을 득)과 ★을 기재하도록 인사팀에 지시했다. 조 행장이 관심 있는 지원자라는 의미의 표시였다.
신한은행은 그동안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 명단 리스트를 엑셀 파일로 만들어 관리했다. 지원자 중 국회의원, 유력 재력가 등 신한은행 영업 및 감독에 영향에 미칠 수 있는 외부 사람은 ‘특이자‘로, 신한금융지주 부서장 이상의 자녀는 ‘임직원 자녀‘로 분리했다.
신한은행은 2016년 9월 23일 신규행원 채용 원서 접수를 마감했다. 인사팀은 특이자 나OO의 지원 서류를 보고 이런 평가 의견을 남겼다.
“나OO 지원자의 서류를 심사한 결과 학업성취도가 낮고 지원한 IT분야 전문역량이 열위이며, 금융권 준비 노력이 부족하고, 학점 필터링컷 해당(3.0미만)하여 불합격권에 속한다.”
좋은 말은 하나도 없다. 라응찬 전 회장의 조카손자가 1단계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게 된 상황.
신한은행은 서류전형에서 자체 ‘필터링컷’ 기준을 세워 운영해왔다. 학과, 학점, 어학, 자격증, 연령 등 항목별 배점 기준을 적용해 서류 평가를 하되(인사부 자기소개 평가 항목은 제외), 필터링컷에 해당하는 지원자들은 ‘자격미달‘로 표시했다.
2016년 하반기 채용의 경우 학점 필터링컷은 3.0 미만이었다.
보고를 받은 이승수 인사부장은 2016년 10월께, 인사팀에 특이자 나OO에 대한 재심사를 지시했다.
인사팀의 일처리는 하루가 안 걸렸다. 인사팀은 같은 날 한 장짜리 ‘개별 보고서‘를 작성해 이 부장에게 제출했다. 나OO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한 상세 분석 내용이 담겼다. 이 부장은 나OO의 ‘서류 전형 합격‘을 지시했다.
신한은행은 채용 후반부로 갈수록 과감해졌다. 임원 면접 때는 아예 특이자 나OO을 위한 ‘전용 면접조’를 꾸렸다.
앞서 신한은행은 나OO에 대해 “학업성취도가 낮고 지원한 IT분야 전문역량이 열위“하다고 평가했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신한은행은 다른 IT분야 지원자 52명을 모두 ‘IT면접조‘로 편성한 반면, 나OO은 ‘일반직 행원 면접조‘로 구성했다. 한 번도 어려운 특혜를 두 번이나 준 셈인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부장은 직접 나OO이 편성된 임원 면접조의 면접위원으로 들어갔다. 면접위원 4명 중 3명은 그에게 B등급을 줬지만, 이 부장은 A등급을 줬다.
결국 나OO은 2016년도 하반기 신규행원 채용에서 최종 합격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손주철)는 업무방해,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조용병 전 행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올해 1월 선고했다.
“지원자 나OO은 서류전형 및 2차 면접에서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합격하지 않은 지원자인 바, 피고인 조용병이 나OO을 서류전형에 합격시킨 행위는 위계로 위 지원자에 대한 1차 면접(실무 면접)위원들의 면접업무를 방해함과 동시에 피고인 이승수를 제외한 2차 면접(임원 면접)위원들의 면접업무를 방해한 행위에 해당한다.”
1심 판결문 기준, 라응찬 전 회장의 조카손자 외에도 신한은행 내부 임직원 자녀로서 부정 채용된 인물은 총 9명이다.
이들은 이OO 신한금융지주 부사장 자녀, 박OO 신한금융지주 준법감시인 자녀, 신OO 신한은행 본부장 자녀, 박OO 신한은행 본부장 자녀, 한OO 신한은행 조사역 자녀, 진OO OO병원 신한은행 지점장 자녀, 양OO 신한은행 부행장 자녀, 노OO OO 신한은행 금융센터장 자녀, 안OO 신한은행 부행장의 자녀다.
이 중 대다수가 아직 신한은행을 다니고 있다.
사실 신한은행의 임직원 자녀 부정 채용은 유서깊다. 2018년 초 금융권을 휩쓴 은행 채용비리 논란 당시, 금융감독원은 신한은행 채용비리 관련 재조사를 시행했다. 그때 금감원은 신한금융 임직원 자녀 채용의 적정성 검사를 선포했다.
검사 결과, 신한은행에서 발견된 특혜 채용 정황은 총 12건. 그 중 임직원 자녀가 5건, 외부 추천이 7건이었다.
금감원은 임직원 자녀 채용추천에 따른 특혜채용 사례를 함께 발표했다.
신한금융그룹의 전현직 고위 임직원 자녀가 계열사를 재직하는 문제도 꾸준히 비판받아 왔다.
라응찬 전 회장의 차남은 1992년 신한은행에 입사한 후 신한프라이빗에쿼티 이사까지 오른 뒤 퇴사했다. 1992년은 라 전 회장이 신한은행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이백순 전 신한은행장의 딸 역시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신상훈 전 신한음융지주 사장의 아들도 신한은행에 입사해 근무하다 퇴사했다.
김형진 전 신한금융투자 사장의 아들은 신한카드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다 정직원으로 채용됐지만 2018년경 퇴사했다.
법원에서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합격하지 않은 지원자“라고 인정한 나OO은 아직 신한은행에 다니고 있다.
사단법인 ‘전국은행연합회‘가 자정의 의미로 2018년 6월 제정한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한탄이 나오는 이유다.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 제31조에 따르면, 지원자가 부정한 채용청탁을 통해 합격한 사실이 확인된 경우 은행은 해당 합격자의 채용을 취소 또는 면직할 수 있다. 하지만 신한은행은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배진교 21대 정의당 국회의원 의원실은 “판결상 유죄로 인정된 부정입사자의 채용을 취소할 계획이 있는지” 신한은행에 질의했다. 신한은행은 “해당 재판은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며, 재판 결과는 확정되지 않아 질의하신 계획에 대해 답변이 불가하다“고 답했다.
1심 판결에도 끄떡없는 신한은행과 마찬가지로, 조 전 행장의 행보도 거침이 없다. 조 전 행장은 올해 3월 신한금융지주 회장 연임에 성공했다.
기자는 반론을 듣고자 부정입사자 나 씨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그는 전화 통화를 거부했다.
입사지원서를 낼 땐 성적-노력-학점이 다 부족했지만, 어쨌든 그는 오늘도 신한은행 직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