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위대한 보통 사람의 시대‘를 표방한 노태우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1988년)을 했다. 그때 A씨는 네 살이었다.
삼촌은 ‘국민의 정부‘를 내세운 김대중 정부 때 재정경제부 장관(1998년)을 한 번 더 했다. A씨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삼촌이 장관을 두 번 지낸 20세기가 한참 전에 저문 2013년, A씨는 신한은행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2020년, 삼촌과 조카는 신한은행 취업비리 관련 유죄 판결문에 나란히 등장한다. 조카 A씨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위대한 노력을 해도 이룰 수 없는 방식으로 신한은행에 입사했다.
조카 A씨와 삼촌 이규성 전 장관을 만나 ‘그들만의 취업 기술‘을 들어보고 싶었다. 지난 7월 1일 오전, A씨를 먼저 찾아갔다.
부정입사자 A씨는 현재 신한은행 서울 강남 모 지점에서 일한다. 서울지하철 7호선 역 출구에서 도보로 금방 닿는 곳이다.
은행 내부에는 고객이 많지 않았다. 직원 네 명이 창구에서 고객을 맞았다. 저쪽 끄트머리 ‘어르신 전용 창구‘에서 일하는 A씨가 보였다.
고객 응대를 마친 A씨는 오전 11시 30분께, ‘식사 중‘이라 적힌 안내판을 내놓고 은행 밖으로 나갔다. 상사로 보이는 남성 한 명도 함께 나섰다. 밖으로 나온 A씨에게 다가갔다.
- 기자 “신한은행 채용비리 1심 판결문에 본인 이름이 등장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A씨 “아무 의견 없어요.”
A씨는 가던 길을 갔다.
- 기자 “채용비리 관련 내부 징계는 없었나요?”
- 기자 “채용청탁 사실을 알고 2013년 신한은행 상반기 공채에 지원하신 건가요?”
A씨는 기자에게 버럭했다.
“밥 먹으러 가는 사람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그는 두부요리 전문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이번엔 식당 밖에서 기다렸다.
그는 식사를 빨리 마쳤다. 2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은행으로 향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이규성 전 장관이 큰아버지죠?”
그는 대답 대신 불쾌한 기분을 나타냈다.
“KBS <시사직격> 취재팀도 다녀갔는데, 적당히 좀 하시지… 왜 자꾸…”
1심 법원이 취업비리를 유죄로 판단하고, KBS 시사프로그램이 관련 내용을 보도해도 무사히 신한은행에 다니는 전직 장관 조카. ‘이런 현실이 당신의 부정한 입사 만큼 중요한 뉴스여서 취재한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은행으로 들어가 일을 했다.
“나한테 자꾸 묻지 말고 신한은행에 정식으로 물어 보시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그의 요구대로 신한은행에 물었지만, 그쪽도 대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사실 A씨의 신한은행 입사는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신행은행은 연령, 학력 등을 차별하지 않고 신규 행원을 뽑는다고 공표했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뒤로는 나이, 학점 등으로 사람을 걸러냈다.
근데, 이 거짓말을 불법으로 돌파해 정규직을 쟁취한 인물이 바로 A씨다. 내막은 이렇다.
신한은행은 2013년 상반기 신규 행원 채용공고를 그해 4월 9일에 게시했다. 일반직 100명 선발을 예고했다. 응시 자격은 연령, 학력, 전공 제한이 없다고 했다. 이 공채에 약 1만 명이 지원했다. A 씨도 그 중 한 명이다.
성실하게 은행 입사를 준비하는 많은 취업준비생과 그 가족이 절대 알리 없는 사실 하나. 신한은행은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 명단을 엑셀 파일로 만들로 관리했다. 쉽게 말해, ‘될 만한 집 자녀’ 리스트를 이미 작성해 뒀다는 뜻이다.
이규성 전 장관의 조카 A씨는 ‘특이자’로 분류됐다. 국회의원, 유력 재력가 등 신한은행 영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집 자녀가 여기에 해당한다.
2013년 5월 14일 출력된 ’2013년 상반기 신입행원 특이자 명단‘을 보자.
특이자 A씨의 경로 란에는 ‘정OO (신한은행) 실장‘이, ‘비고’ 란에는 ‘금융감독원 이OO 비서실장‘이 적혀 있다. ‘경로‘는 특이자의 전형 결과를 알려줘야 하는 사람, ‘비고‘는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에 대해 취합한 정보를 의미한다.
이렇게 ‘특이자‘로 분류된 A씨는 본격적으로 특별 관리를 받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한은행은 입사 전형에서 연령, 학력 등으로 차별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자체 ‘필터링컷’ 기준을 세워 운영해왔다. 학과, 학점, 어학, 자격증, 연령 등 항목별 배점 기준을 적용해 서류 평가를 하고, 필터링컷에 해당하는 지원자를 ‘자격미달‘로 표시했다.
2013년 상반기 공채 당시 신한은행은 남성의 경우 군필 29세(1986년 이후 출생자), 여성의 경우 27세(1988년 이후 출생자) 미만만 뽑았다. 나이로 차별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업주가 연령을 근거로 근로희망자를 차별하는 건 위법이다. 고령자고용법 제4조의4에도 “사업주는 모집과 채용 분야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 또는 근로자가 되려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나온다.
A씨는 1985년 5월생으로 ‘자격미달‘이었다.
김인기 신한은행 인사부장은 A씨의 자격미달을 서진원 행장에게 보고했다. 서 행장은 분명한 지시를 내렸다.
“A씨, 합격시켜.”
김 인사부장은 서 행장의 지시를 따라 채용팀장-채용팀 과장과 함께 부정채용을 공모했다. 연령 필터링컷은 A씨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이 자격미달에 걸려 서류에서 탈락한 지원자는 34명이다.
특이자 A씨는 모든 전형을 통과해 그해 신한은행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손주철)는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인기 전 인사부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올해 1월 선고했다.
“지원자 A는 서류전형이나 1차 면접에서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합격하지 않은 지원자인 바, 피고인 김인기가 지원자 A를 각 서류전형에 합격시킨 행위는 위계로 해당 지원자들에 대한 1차 면접위원들의 면접업무를 방해함과 동시에 2차 면접위원들의 면접업무를 방해한 행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신한은행은 왜 A씨를 불법으로 뽑았을까. 누군가의 외압, 청탁이었을까 아니면 신한은행이 알아서 ‘로얄 패밀리‘를 따로 챙긴 걸까?
A씨가 채용된 이후에 작성된 신한은행 ‘인비직원세평‘에 궁금증을 풀 작은 실마리가 있다. 신한은행 인사부 전산담당자는 부정입사자 이 씨에 대해 이렇게 입력했다.
“메모 – [입행시 특이자] A
금융감독원 조OO 부원장 (이OO 비서실장) – 이규성 前 장관 조카
thru 민정기 (신한금융지주) 부사장”
메모를 해석하자면, “특이자 A는 이규성 전 장관의 조카로 금융감독원 조OO 부원장과 이OO 비서실장을 통해 민정기 신한금융지주 부사장을 경로(thru)로 입사했다“는 의미다.
이규성 전 장관이 공직에서 물러난 지가 언젠데, 어떻게 금융감독원 부원장까지 그의 조카를 챙겼다는 걸까. 무엇보다 메모에 등장하는 조OO 부원장은 이규성 전 장관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
기자는 지난 8월 12일 반론을 듣기 위해 공소장에 적시된 조OO 금감원 전 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이규성 전 장관과 아예 모르는 사이“라며 “신한은행에 특이자 이 씨를 청탁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A씨의 큰아버지이자, 공소장에 적시된 이규성 전 장관의 반론을 듣고자 서울 구기동에 위치한 그의 집도 찾았다. 집 앞에서 약 두 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집에서 일하는 한 사람은 “장관님은 논산 가셨다, 언제 (서울로) 올라오실지 모른다“고 말했다.
해당 채용비리 사건을 수사한 검찰의 공소장, 불법을 인정한 법원 판결문에는 A의 부정채용 방법이 상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어쨌든 이규성 전 장관의 조카 A씨는 ‘필터링컷‘을 몰래 운영한 신한은행의 꼼수를 특혜로 돌파한 인물이다. 로열패밀리 출신이 아닌 일반 지원자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부정하게 신한은행에 입사한 A씨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최고 스펙은 가족‘이라는 풍문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장관 삼촌이 없어 특이자 명단에 들지 못하는 취업준비생들은 오늘도 스펙을 만드느라 고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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