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쏟아졌다. 비바람에 나부껴 떨어지는 나뭇잎과 우산을 쓴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잿빛 하늘 아래 죽음과 삶이 교차했다. 최진경(48) 씨는 이따금씩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 챙에 가려 그녀의 눈이 무얼 쫓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온기가 남은 커피잔만 매만졌다.

그 시절 ‘우산’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유해물질 가득한 연구실에서 그녀를 지켜 줄 ‘우산’이 있었더라면 최 씨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까. 야속하게도 그녀에게 주어진 건 얇은 마스크 한 장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그 현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문서로도 남아 있지 않는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문제가 있던 곳이라도 ‘문제 없는 작업장’이 될 수 있잖아요.

‘문제의 작업장’에서 6년간 일했던 최 씨는 4기 유방암 환자다. 그녀는 몸에 퍼진 암을 일하다 생긴 질병으로 보고,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 씨는 4년 만에 나온 불승인 판정으로 소송 혹은 재심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 소송이나 재심사가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기자님, 저 내일이랑 모레는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최진경 씨와 다음을 기약하고 싶었다. 맛집 탐방과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와 함께 여유로운 식사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만 사는 그녀에게 모레는 어쩌면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바쁜 이유를 묻자 그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을 작정이라고 답했다. 내일은 집을 청소하고, 이튿날에는 중개인이 집을 찾아올 거라고. 그녀는 최근 10분만 청소해도 숨이 가빠 쉬어가는 시간이 늘었다고 했다. 최 씨는 어느덧 청소하는 데 하루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됐다.

그녀는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부모님이 계신 서울에서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녀가 집을 파는 건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이 전부 ‘순둥이’라 그녀가 없으면 집을 매매하거나 관리하는 방법도 잘 모를 거라고. 순박한 가족들을 위해 조금씩 자신의 자취를 지워갔다. 그녀가 없는 삶을 ‘스스로’ 준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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